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사 6
우리는 지난 포스팅에서 하이데거의 저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서론을 살펴보았다. 특히 형이상학의 중심부에 위치한 진리가 어떻게 과거와 다르게 해석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춰 보았다. 결론적으로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진리란 ‘나의 있음’이며 시간과 함께 드러나는 그 ‘있음의 의미’가 되겠다. 도도했던 2500년 철학사의 물결이 바뀌는 순간이다.
이번 포스팅은 이 책의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해석해 보도록 할 것이다. 무슨 원서를 번역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해석이라는 용어를 써야 하는 현실이 어이없기는 하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언어에 익숙해질 때까지 누구나 해석의 단계를 벗어날 수 없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언어에 집착하기보다 그의 의식 흐름을 함께 느껴가면 이해가 빠를 수 있다. 그런데 이 또한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의 주제는 ‘무’이다. 독일어로 das Nichts로 기술된 이 용어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에서 실질적으로 존재 혹은 진리를 대체하고 있다. 그 맥락부터 살펴본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자이다. 다른 존재자도 던져져 있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던져짐을 사유한다. 그래서 인간은 실존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얻게 된다. 실존은 개인임과 동시에 관계이다. 모든 실존은 다른 실존과의 관계에서 존재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지각하고 언어로 기록하며 후세에게 전달하는 행위는 현상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 특징을 바탕으로 하이데거는 실존의 존재를 하나의 의미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진리의 드러남을 사유한다.
하이데거에게 존재가 가능한 유일한 조건은 실존의 태도에 달려 있다. 존재란 무엇일까? 하이데거에게 이 질문은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 존재란 실존이 보이는 ‘있음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현존재 – das Dasein – 로 이름을 붙인 인간이라는 실존은 다음과 같은 행위에서 본질적 특징을 갖는다.
“세계 관련이 향하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태도를 이끌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침입에 있어 탐구의 논쟁이 다루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것을 넘어선 아무것도 아니다.”
마치 암호와도 같은 이 단락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철학의 조건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은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실존적 본질이다. 그러나 수학적 동어반복을 피하려면, 진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진리의 드러남이란 그것을 사유하는 실존의 드러남과 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무의 탄생은 이러한 실존의 존재와 관련이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을 공정하고 상식적인 언어로 풀어보도록 하자.
형이상학의 근본문제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존재를 탐구한다. 형이상학의 이 과제는 나의 현존재, 즉 실존의 그 ‘있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수행된다. 얼핏 세계를 주관적 자아로부터 연역하려는 유아론이 떠오를 수도 있다.
일단 우리는 긍정적인 측면을 본다. 하이데거는 존재자 자체가 드러날 수 있는 학문의 가능 조건을 말하고 있다. 존재란 존재자 자체에 대한 탐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현상학의 연관성이 떠오른다. 존재를 존재자와 외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보았던 전통 형이상학과의 차별성도 여기에 있다. 더 나아가 존재란 존재자 자체를 탐구하는 현존재, 즉 ‘실존의 사건’을 넘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한다.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표현은 별 무게가 없다. 있음 옆에 부수적인 부정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무(無)의 현상을 매우 중대한 존재의 사건으로 간주한다. 존재자에 대한 실존적 탐구가 그 마지막 단계에서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건으로 종결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는 학문의 토양을 일종의 무화(nichten) 작용에서 본다. 사실 우리는 학문적 탐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무화 현상을 경험한다. 누구에게나 상식적인 예를 들어보자.
연인을 만나기 위해 누군가가 미리 약속장소로 정해둔 카페에 급히 들어선다. 주말이라 그런지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북적대고 있다.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헤집으며 그는 익숙한 얼굴을 찾아야 한다.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중 마침내 그는 원하는 얼굴을 발견하곤 미소를 지으며 다가선다.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장면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일까? 섬세한 감성으로 이 과정을 들여다보면, 무화작용이 선명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연인을 찾기 위해 주위를 살피는 사람에겐 연인을 제외하고 그 누구의 얼굴도 ‘아무것도 아니다’. 역으로 말하면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관심 밖에 둘 때만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웃 오브 포커스의 작용이 곧 무화 작용의 원형적 형태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무화 작용이 지니는 존재론적 성격에 주목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우리가 의도한 바를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라면, 그것은 이미 중대한 사건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묻는다. 도대체 왜 존재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발생하는 것일까? 무(無)란 도대체 무엇일까?
존재자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무의 현상과 만나는 일은 불가피해 보인다. 하이데거가 왜 형이상학의 중심부에 무의 현상을 위치시켰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지난 시절의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전통 형이상학이 존재의 문제를 늘 이러저러한 존재자의 모습으로 환원시켰듯, 그런 식으로 형성된 고정관념은 무의 현상에 직면하여 존재자의 모습만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의 현상은 존재자를 탐구대상으로 삼는 이론적 언어에 의해 붙잡힐 수 없다. 우리가 무를 탐구하면 할수록 무의 현상은 우리의 시야를 벗어난다. 가장 엄밀한 학문으로 알려진 논리적 사유조차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하이데거의 고민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우리의 상식적 사유가 무의 현상을 일차적인 차원에서 말살하여 버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를 이해할 수 있을까?
무(無)를 위한 예비고찰
하이데거는 무의 현상을 인간학적 관점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일까? 철학사에 등장하는 <철학적 인간학>의 주된 관심사가 하이데거에게도 암암리에 흘러 들어가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철학적 인간학>의 주된 논제가 결핍, 열림, 가능성이라면, 진리와 실존의 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철학적 인간학>의 성과를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근원적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의 지위를 복원하는 일이다. 새롭게 복원된 형이상학은 기존의 철학적 성과를 검증하고, 그것이 올바른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무의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하이데거는 무가 발생하는 최초의 시점으로 돌아가 그 어색하고 생경한 느낌을 정확하게 묘사하고자 한다. 현상학의 엄밀한 언어가 등장하는 지점이 여기이다. 그로부터 하이데거는 무의 존재론적 의미를 밝힐 수 있다고 믿는다. 무가 발생하는 최초의 지점은 어디일까? 하이데거의 기록은 대단히 실존적이다.
“우리가 존재자 전체를 그 자체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하듯이, 우리가 분명 어떤 형태로든 전체에 있어 밝혀져 있는 존재자의 한가운데에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것도 확실하다. 결국 존재자 전체를 그 자체 파악하는 것과 전체로서의 존재자 한가운데에 처해 있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성립되고 있다. 전자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후자는 우리의 현존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우리가 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그때그때마다 오직 이 존재자 또는 저 존재자에만 매달려 있는 듯 보이고, 존재자의 이 영역 또는 저 영역에 파묻혀 있는 듯이 보인다. 이렇듯 일상생활이 산산이 분산되어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일상생활은 언제나 존재자에 대해 비록 그림자 같은 어렴풋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전체를’ 하나의 단일성 안에 견지하고 있다. 우리가 사물들 또는 우리 자신에 정신없이 몰두하고 있지 않을 때라도, 아니 오히려 바로 그때에 존재자는 더욱 ‘그 전체로’ 우리를 엄습해 온다. 예컨대 본래적인 지루함에서처럼 말이다. 이 지루함은 이 책 혹은 저 연극, 저 일 혹은 이 휴식이 단순히 우리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 권태는 ‘이유 없이 누구에게 모든 것이 권태롭다(지루하다, 귀찮다)’할 때에 고개를 드민다. 깊은 권태는 현존재의 심연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안개처럼 이리 저리 몰아치면서, 모든 사물들과 인간들을,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그 자신까지도 모두 기묘한 무관심 속으로 휘몰아 넣는다. 이 지루함이 존재자를 그 전체에 있어 드러내 보인다.”(WM, 30)
인용된 지문은 의식의 현상을 실존적 관점에서 엄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실증학문은 정교한 관찰과 엄밀한 인과법칙을 동원하여 존재자의 원리를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성공 가능성은 사실 희박하다.
하이데거의 눈에 비친 실증학문은 자신이 약속한 땅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능력이 처음부터 없어 보인다. 우리가 존재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근거란 그 내부로 들어가 관계를 맺는 우리의 태도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실존이 존재자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고 말할 뿐이다. 양자를 구별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은 일단 중요하다. 이 구별에 실패하면 엄밀한 학은 고사하고 그저 인간의 이기적 관심을 존재자에 대한 객관적 정보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우리가 세계와 만나는 원초적 지점으로 되돌아가자고 조언한다. 거기에서 그는 무심히 주위를 둘러보고 나와 무관한 존재자들에 그저 낯섦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느낌, 이 근원적 지루함과 함께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세계 내의 존재자가 그 전체의 모습으로 나의 실존을 엄습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지 한번 경험해 보기 바란다.
하이데거는 지루함이라는 이 미세한 정서(Gestimmtsein)가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한가운데에 머물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나의 실존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처해 있을 때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서의 존재론적 의미
우리는 하이데거의 사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정서(Stimmung)라는 용어를 설명해야만 될 시점에 도달하였다. 왜 갑자기 정서인가? 무의 현상이 드러나는 지평이 바로 실존의 정서와 같은 영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삶의 지평을 개별 실존의 정서에서 찾는다.
일정한 정서에 사로잡혀 있음은 우리가 세계와 만나고 있는 원초적 지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원초적’이라는 어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벌써 몇 번에 걸쳐 사용한 용어이다. 후설에게 순수 의식이 하이데거에는 원초적이라는 의미로 번역된 것이다.
정서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허함, 포근함, 차가움, 위로, 분노, 절망, 질투, 부러움, 이런 일상적 느낌들은 일정한 대상과 함께 등장하기도 때로는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원초적 정서는 세계와 연계된 의식의 심리적 변화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심리적 변화가 발생하기 이전의 심오한 단계로 내려간다. 세계 내의 존재자들이 어떻게 실존의 정서에서 단일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대상적 느낌의 가능 근거를 묻고 있다. 느낌이 단순한 심리적 과정을 묘사하고 존재자와 혼연(渾然)이 되게 한다면, 정서는 세계 안의 존재자로 향함으로써 나와 세계 그리고 타인을 단일한 전체로서 드러나게 하는 일종의 존재의 사건이다.
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원초적 정서가 대상에 묻혀 있지 않듯, 무는 대상성을 지니지 않는다. 무의 현상이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무의 체험은 대단히 중요하다. 무의 현상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자신과 세계를 단일한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기록하는 최초의 방식이 바로 무를 체험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대상이 없는 무엇을 우리가 어떻게 체험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을 다룰 때 우리는 무가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성격을 함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무는 이성을 통해 합리적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스스로 자신을 알려온다. 하이데거는 무가 자신을 알려오는 가장 탁월한 상태를 불안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불안은 무엇에 대한 불안이다. 직업에 대한 불안이나 노후에 대한 불안 등이 전형적인 예가 되겠다. 하지만 무가 자신을 알려오는 불안에는 특정한 대상이 없다. 우리가 불안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적 방식은 일정한 규정성의 결여가 아니라 애초부터 규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무가 드러나는 불안의 상태, 하이데거의 언어를 인용해 보자.
“우리는 불안 속에서는 ‘무엇인가가 누구에게 섬뜩하다’고 말한다. 이 ‘무엇인가’와 ‘누구에게’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누구에게 그 무엇이 섬뜩한바 그것을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전체가 그 누구에게 전반적으로 그런 것이다. 모든 사물들이, 우리 자신까지도 될 대로 되라는 무관심 속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사라져 버린다는 의미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체의 것이 뒷전으로 미끄러짐으로써 우리를 향하여 돌아선다. 불안 속에서 우리를 엄습해 오는, 존재자 전체의 이러한 뒷전으로 빠짐이 우리를 조여 온다. 거기에는 붙잡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 남아 있어 우리를 덮쳐 오고 있는 것이란 - 존재자가 미끄러져 빠져나감으로써 - 단지 아무것도 ‘없다’는 그것뿐이다.”
불안이 우리의 내부에서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를 엄밀한 현상학적 언어로 기록한 부분이다. 우리가 하이데거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이나 민감하고 세심한 시선으로 우리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엄밀하고 주의 깊은 시선은 비단 하이데거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철학적 사유 일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보다 엄밀한 내적 관찰이 필요하다.
사물의 본질을 엄밀한 방식으로 기록했던 형이상학이 가장 이성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과제를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성의 합리적 시선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는 형이상학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합리적 계산을 추동하는 어두운 내적 동인을 찾아 더욱 깊은 의식의 심연으로 내려갈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본질을 물을 때, 우리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다. 인간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이기 때문이다. 이 누구를 하이데거는 현존재라고 부른다. 현존재는 항시적인 불안과 함께 무 속으로 들어가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 무의 자리지기(Platzhalter des Nichts)가 된다.
무란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이 질문을 형이상학이 대답해야 할 일차적 질문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무가 어떤 특별한 존재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무가 탁월한 대상에 대한 기분을 뜻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무란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이 또한 만족스러운 답변이 될 수는 없다.
무의 현상과 그것에 대한 체험은 분명 특별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무를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실존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 내부에서 무는 스스로를 드러내며 어느 순간 사라진다. 이 드러남과 빠짐 사이에는 인간실존의 중요한 부분이 감춰져 있다. 그것이 바로 현존재의 ‘열려있음’이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정점에 무를 올려놓은 이유가 바로 현존재의 열려있음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서이다. 기존의 형이상학이 현존재의 본질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그것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무의 현상을 단순히 논리적인 부정으로 간주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의 결과는 단순히 학문적 편협함에 그치지 않는다. 실존을 여타의 존재자와 동일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자기오해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이데거는 무를 체험하는 현존재의 분석을 통해 대상화될 수 없는 현존재의 초월성을 복원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무를 형이상학과 연계시키는 하이데거의 의도이다. 형이상학의 중심부에 초월성이 놓여 있듯, 현존재의 본질에는 무를 체험하는 초월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무의 밝은 밤
무의 체험은 실존의 본질에 속한다. 개인이 실존인 이유는 자연이 부여한 자기보존이라는 그 직접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부에서 무의 현상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바로 내면의 저항을 말한다. 주변의 존재자에 온통 몰입될 때, 개인은 자신을 잃어버린다. 비록 어디로부터 오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지만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내면의 흔들림을 제험할 때, 우리는 불안해한다.
그 불안함이 일체의 존재자를 부정하며 등장하기에 논리적 언어로 부정인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논리학의 이념이 ‘하나의 보다 더 근원적인 물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 해체’(WM 60)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무의 체험 속에서 존재자 자체의 근원적 ‘열려있음’의 모형을 본다. 이러한 현상을 하이데거는 ‘무의 밝은 밤’이라고 부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무의 밝은 밤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 포스팅의 역할은 여기까지이다. 이 저서에 대한 결론을 요약하는 것으로 하이데거 편을 정리해 보자.
도대체 왜 존재자는 있고 무(無)는 없는 것일까?
서론에서 하이데거는 기존 형이상학에 대한 극복이 왜 필요한지를 묻는다.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의 본질을 나름대로 추구했다. 눈에 보이 것에만 집착하였던 실증학문과는 달리 형이상학의 시도는 분명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실증학문이 눈에 보이는 대상, 사물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았지만,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의 문제까지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둘의 사유방식은 겉으로만 다를 뿐 존재자를 기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존재를 파악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자의 규정성으로 되돌아가는 환원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제 하이데거는 존재와 무의 형이상학을 전개하면서 형이상학을 완성하려한다. 기존의 형이상학이 존재와 무의 현상을 밖에서부터 안으로 끌고 들어 왔다면, 이제 하이데거는 우리의 삶이 형이상학의 여정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밝히려고 한다. 애초부터 인간의 실존은 형이상학의 모습이었다.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놓여 있는 차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이 포스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이 책의 실질적인 중심주제이다. 이 질문에는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다.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하이데거가 전제한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해하면, 차이가 곧 존재이다. 달리 말해서 존재가 존재자의 발생 근거인 이유는 존재가 곧 차이이기 때문이다. 존재를 무와 동일시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차이가 발생하면서 존재자의 의미가 들어온다. 지루함, 권태, 낯섦, 불안 등은 존재가 곧 차이임을 확인해 주는 실존적 정서이다. 이러한 실존적 정서는 대단히 낯설고 종종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적 기반을 붕괴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마주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전체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거친 파도와 함께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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