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사 4
이 포스팅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현상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할 것이다. 후설의 비교적 초기 저서에 속하며, 다른 저서에 비하면 그나마 대중의 접근을 허용하는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이 여기서 활용할 텍스트이다.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은 당대 인기를 구가하던 경험주의와 심리주의에 대한 철학의 거리 두기였다. 후설은 ‘엄밀한 학으로서 철학’이 어떠한 과제를 안고 있는지 핵심 견해를 밝힌다. 그가 언급하는 심리주의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로이트나 그의 계승자들이 발전시킨 정신분석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실증주의 영향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던 임상 및 실험 심리학을 가리킨다.
철학의 정체성
먼저 철학의 정체성에 대한 후설의 견해부터 시작해보자. 철학이란 무엇일까? 필자가 이전 포스팅에서 던졌던 동일한 질문이 후설에게도 매우 중요했다. 여기에 덧붙여 후설은 시대가 요청하는 철학의 엄밀함을 회복하려는 학문적 욕망을 품었다. 이러한 지적 욕망은 근대철학, 특히 근대 인식론의 주된 동기였는데, 후설이 직접적인 계승자였다. 그의 언어를 직접 들어보자.
“철학은 그 최초의 출발 이래 엄밀한 학문이 되고자 하는 요구를 지녀왔다. 즉 철학은 최고의 이론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윤리적 - 종교적 관점에서도 순수한 이성의 규범에 의해 규제된 삶을 가능케 해주는 학문이 되고자 했다. 이러한 요구는 때로는 보다 크게, 때로는 보다 작게 효력을 발휘했는데, 완전히 포기된 적은 결코 없었다. 또한 순수한 이론에 대한 관심과 수행능력이 위축되어 위협받았던 시대에서나, 종교적 권력이 이론적 탐구의 자유를 박탈했던 시대에서도 그 요구는 결코 포기되지 않았다.”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 서론)
후설은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claraet distincta)을 추구하는 데 당시 철학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모든 존재와 인식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근거를 확보하는게 철학의 잃어버린 위상을 살리는 제일 과제로 보였던 것이다.
<근원적, 절대적, 범용적>, 철학에만 있을 법한 전문용어가 눈에 띈다. 이 키워드는 현대 유럽 철학에는 다소 낯선 용어이다.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이,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이, 범용성보다는 특수성이 필자에게는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진다. 현대 유럽 철학은 전통 철학의 주된 관심사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형성되기까지, 후설의 현상학, 특히 그의 방법론적 선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후설에게서 확인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후설은 제일 철학이자 모든 학의 기초학인 철학에 어울리는 인식의 기초를 세우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유전되온 기하학적 사고 모델이다. 그리고 그 토대는 ‘자명한 것’이어야 한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문장이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를 일단 소환해 보자.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과 학문의 굳건한 기초를 세우기 위해 기존의 이론을 모두 무너뜨리는 과감한 시도를 하였다. 그를 통해 명석하고 판명한 근거를 도출해 낸다. 그것이 그 유명한 cogito, ergo sum 이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에게 자명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마도 종교적 교리가 자명할 것이다. 특정 이념이나 가치관에 경도된 사람은 그 안에 담긴 세계관이 아마도 자명할 것이다. 후설에게는 무엇이 과연 자명한 것이었을까?
현상학의 원리
후설은 현상학의 원리를 절대적 무전제로부터 출발한 ‘자명한 것’에서 찾았다. 그것이 무엇일까? 사실 데카르트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에서 자명함을 찾았다면, 그 대신 후설은 우리의 의식 속에 ‘근원적으로 부여된 직관’에서 그 자명함을 찾는다.
이로부터‘순수한 내재성, 본질적 통찰’, 이런 엄청난 전문용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리는 가장 상식적인 차원에서 논의를 풀어보고자 한다. 예컨대 어떠한 주장, 가치관, 생각 등 우리 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필자의 눈에는 데카르트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기는 한다. 일단 후설은 그 밑바닥을 의식의 직관적 소여, 혹은 직접적 소여라고 부른다.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어떤 개념이나 명제도 결국은 가장 근원적인 의식의 밑바닥으로 돌아가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그 어떤 것도 사실은 상대적 주관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하게 해두고 넘어가야 할 전제가 있다. "사태 그 자체로!"라는 훗설의 선언은 사실 의식의 심연, 이른바 의식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려는 극단적 인간학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간단히 말해서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의 구조와 주관적 경험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당연히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후설의 현상학은 절대적인 관념론일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후설이 의식의 밑바닥에서 진리의 흔적을 찾으려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에게는 진리의 객관성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다. 어떻게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까?
일단 후설의 현상학이 의식의 밑바닥을 확인하려는 근거가 중요하다. 그래야 그 위에 다양한 관념의 성을 견고하게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관적 상대성을 거부한다. 오히려 후설은 자신을 진정한 의미의 '실증주의자'라고 부른다. 일종의 방법론적 실증주의이다. 이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심리주의 비판
심리주의 혹은 심리학주의라고 불리는 사고는 수학적 논리에서 상징적 사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식 과정을 심리적 현상, 특히 심리적 인과과정으로 설명하려는 주의를 말한다. 특히 심리주의는 자연현상을 물리학으로 설명하듯 논리학의 법칙을 심리작용의 법칙으로 해석한다. 결국, 인간의 모든 인식이란 경험적으로 얻어지는 개연적 상대성을 피할 수 없다.
유명한 심리 실험을 예로 들어 보자. 다음 영상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몇 번이나 공을 서로 주고 받는지 세어보라. 집중해서 정확하게 관찰해야 한다. 몇 번일까?
15번인지 16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혹시 영상에서 고릴라가 지나가는 것이 보이는가? 보지 못했다면, 다시 한번 영상을 돌려보라. 아마도 고릴라가 보일 것이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에서 진행했던 이 유명한 실험은 외부 대상이나 사태가 우리의 주관적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일종의 심리 폭격이다.
후설은 심리학의 다양한 설명이 갖는 설득력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논리적 필연성이나 진리의 객관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철학의 정체성과 관련된 과제이기 때문이다.
지향성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후설은 어떻게 진리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의식의 내면에서 자명한 것을 찾았음에도 후설은 심리적 상대성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 최종 결과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후설은 역설적이게도 당시 심리학 스승이였던 브렌타노(Brentano)의 지향성 개념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후설 현상학의 핵심이다.
지향성이란 인간의 의식은 반드시 "무엇에 대한" 작용으로서 그 대상을 지향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명제이다. 지향된 대상 자체는 허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자체인 지향적 관계는 비실재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후설은 그렇게 믿는다.
후설은 이 지향성에 대한 믿음을 통해 심리주의로부터의 탈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심리주의는 의식작용과 의식대상을 혼동하고 있기에 상대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언제나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으로서 지향적인 것이다. 따라서 의식대상과 의식작용은 그 ‘있음’의 방식이 사실상 다를 수밖에 없다.
심리적 사실로서의 의식작용은 시간적으로 생성되고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반면 의식대상, 즉 지향적 대상은 의미를 발산하는 객관적인 존재이다. 심리주의는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심리작용과 그로부터 얻어진 심리적 표상에 머물렀다는 것이 후설의 논점이다. 백문이 불여일 예이다.
한때 유명세를 날렸던 <상실의 시대>의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품에 대한 소개를 다음처럼 했다고 한다. “내가 이 작품을 통해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누군가에 대한 심리적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의미는 다르다. 관계로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역동적 현상일 테니까.
후설은 의식과 대상의 관계가 지향적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 관계의 동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여기서 후설은 과거 스승이었던 브렌타노와 결별한다. 후설은 인간의 의식이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다채롭게 현상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의 현상학이 의식의 현상학임과 동시에 객관성을 유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상이 현상하는 의식의 동적인 측면을 엄밀한 방식으로 기술하려는 노력이 후설 현상학의 특징이다. 이를 철학사는 ‘기술적 현상학’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관찰하고 기술한다는 의미이다. 언어적 테크닉이 필요한 걸까? 언어를 다루는 능력은 당연하다. 덧붙여 사태를 바라보는 감수성, 예리한 직관력이 더 중요하다.
‘엄밀한 학’이 되기 위한 일종의 조건이다. 현상에 대한 언어적 기술이라는 것이 외부 대상에 대한 경험적 체험을 기술하는 거라면, 사실 심리학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후설은 심리 현상을 기술하는 심리학과 현상학은 확실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여러분은 구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일단 후설의 주장을 따라가 본다. 후설의 버팀목은 ‘순수 기술’이라는 용어에 있다. 현상학은 경험적 심리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심리에 토대를 제공하는 원형적 체험에 근거를 둔다. 그로부터 후설은 단순한 심리적 인과현상이 아니라 사태의 의미에 이를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과 그 사랑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현상을 추적하는 일은 확실히 다른 사안이다.
물론 후설 현상학의 이러한 의도는 그것이 지닌 철학적 사유의 정당성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후설 이후 현상학의 전개 과정도 처음 현상학의 출발점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진다. 우리가 후설 다음에 다룰 하이데거부터 벌써 그러하다.
후설 현상학의 현대적 의의
후설에 의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현상학은 실증 학문의 분화로 야기된 ‘철학의 위기’를 반영한다. 하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전통 철학의 중심부에서 멀어진 적이 없다. 그 증거가 이성에 대한 그의 무한 신뢰이다. 현상의 의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성의 직관 능력이 사태의 본질에 이르는 관문이다.
후설은 당시 철학이 위기를 맞이한 이유로 이성의 망각을 지목한다. 후설이 분석한 당시 시대적 맥락을 살펴보면 충분히 설득력과 공감력이 있다. 전통 형이상학을 붕괴시키며 화려하게 등장한 실증 학문의 발달이 인본주의의 정점을 알렸지만, 다른 한편에선 인본주의의 파국을 예고하는 일종의 증후군이었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의 정점은 누구나 쉽게 아는 사실이다. 소비와 성장이 빚어낸 선순환 구조는 화려한 현대 자본주의 시대를 열었다. 한편 인본주의가 정점에 다가설수록 그 폐해도 함께 커졌다. 인간 소외, 관계의 파국, 참혹한 전쟁, 이런 사태의 원흉으로 후설은 이성의 도구화를 지목한다.
인간이 맺은 모든 종류의 관계에서 도구적 이성은 폭력의 근원이다.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대상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그가 맺고 있는 관계를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왜곡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도구적 이성의 횡포는 인간의 의식과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분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곧 현실에 대한 왜곡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상학에서 전제로 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무엇일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란 우리의 존재가 세상으로 던져진 사태, 그 자체를 말한다. 그 던져짐은 의식과의 직접적인 겹쳐짐 속에서만 지각될 수 있겠다.
실증 학문의 문제는 그러한 관계 맺음을 단순히 유용성만으로 해석한 데 있었다. 후설에게는 그러한 자의적 해석이 매우 폭력적인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관계를 기술한다는 것은 의미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가 중요하듯, 존재란 그 존재의 현상으로 자신의 의미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도구적 이성은 인간과 대상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잘라내고 추상화하여 인간의 의식과 주체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후설이 말하는 현대문명의 위기이자 곧 이성의 위기이다.
도구적 이성의 횡포에 맞서 본래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역설적 요청은 ‘사태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철학적 간절함으로 메아리친다. 후설에게 현상학은 인간 현실의 회복이자 의미의 세계를 회복하려는 지극히 인간적 시도였다.
현상학의 문제의식을 우리의 학문적 현실에 적용해 보자. 실증주의의 연장선 서 있는 현대 학문은 감각적 경험과 실증적 검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덕택에 흔히 말하는 검증된 것만이 확실한 지식이라는 인식론적 관점이 대세를 얻었다. 오늘날 객관성이라는 이름은 정당성의 유일한 기준으로 통하고 있다. 사실 실증적 연구가 현실적 토대를 상실한 전통 형이상학의 자리를 무리 없이 대체한 형국이다.
실제로 객관성의 대상은 우리의 감각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대상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대표적인 인식의 틀이 이른바 인과의 법칙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현상이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밝히는 일이다. 예컨대 현상의 기원을 추적하는 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기원을 추적하는 방법론에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설명하기 위해, 실증 학문은 기원을 심리적 혹은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시킨다. 단적인 예가 생물학적 환원주의이다. 이미 근대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은 상이한 종들의 현재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척도로 잡종과 변이를 지목한 바 있다. 그 현대판이 『이기적 유전자 selfish-gene』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도킨스의 이론이다. 그의 주저 가운데 한 대목을 찾아 인용해 보자.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현상을 유전자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유전자가 자기 복제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전자 기계이다.”(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중에서)
‘나’라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나’를 유전자로 환원시킨 결과물이다. 물론 도킨스도 나의 존재가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물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밈(meme)이라는 용어가 그 증거이다.
밈이란 유전자가 유전자 풀에서 이동할 때 몸과 몸이 이동하는 것처럼, 문화와 문화 사이에서 전달되는 각종 정신적 정보의 복제자를 지칭한다. 도킨스에 따르면, 인간은 유전자가 복제되어 진화하다가, 자연선택의 원리에 의해 인격체라는 관념적 존재로 돌연변이 한 존재이다. 그 후부터는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밈의 기계로 성장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존재의 기원에는 고상한 형이상학적 목적이나 의식이 아니라 그저 생존에 맹목적인 이기적 유전자만이 놓여 있다는 것이 논점이다.
도킨스의 생물학적 설명은 명확하고 일리가 있다. 하지만 매우 빈곤하다. 현상학은 그 빈곤함을 보완할 수 있는 상상력을 제공해 준다. ‘나’라는 존재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고유한 서사로 가득한 일종의 심연으로 묘사될 수 있다. 도킨스에게는 단지 종교적 믿음에 불과하겠지만, 개인이 세상과 만나 자신으로 깨어날 때 현상하는 홀로 있음, 불안, 포근함, 생경함, 낯설음, 가까움 등 관계 맺음의 모든 현상은 유전자의 장난도 호르몬의 결핍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드러남이다.
주피터의 화살촉에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발라져 있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사랑의 심연에 빠진 사람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원에 집착하면 할수록 우리는 쉽게 행복과 불행, 사랑과 이별이라는 존재의 현상을 단편적인 물리적 혹은 심리적인 것으로 환원하게 된다.
인간의 정신세계가 심리적 혹은 물리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 긴장, 슬픔, 분노와 같은 다양한 감정을 호르몬의 변덕으로 설명하는 한 인간의 세계는 정신적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정신적인 작용과 그것의 물리적 환원 사이에는 다른 차원의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호르몬을 감정의 기원이라고 간주하는 동안 우리는 기계적으로 호르몬을 주입 받으며 쾌락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사태를 반박할 수 없다.
요약해 보자. 후설은 현상학을 엄밀하고 체계적인 과학으로 정립하고 외부 세계에 대한 일체의 선입관을 배제하면서 의식의 구조와 그 본질적인 특징을 탐구하였다. 궁극적으로 인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후설의 현상학은 삶의 현상을 심리적 혹은 물리적 현상으로 닫아버리는 실증주의적 경향에 맞서 개인의 시간과 공간을 ‘현상’의 이름으로 열어둔다. 이는 삭막한 실증주의 시대에 인간 존재라는 심연을 연구할 수 있는 첫걸음을 내딛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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