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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현대 독일-프랑스 철학사

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의 사상적 흐름

by 지렛대 2023.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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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사 1


 

1.

서양 철학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 철학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현대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다”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당연히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표현은 아니다. 그만큼 2500년에 해당하는 서양 철학의 역사가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왜 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일까? 그에 상응하는 다른 철학의 흐름이 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 바로 현대 영미 철학이다. 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과 영미 철학이 상당히 다른 지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다. 그럴 수 있다. 서양 철학의 흐름에는 이성, 경험, 논리, 언어, 직관, 지혜, 진리 등의 키워드가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두 철학적 흐름은 각각 서로 다른 키워드를 떼어내어 집중적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현대 독불철학은 이성과 직관, 지혜와 진리를, 현대 영미 철학은 경험과 논리, 언어와 진리를 선택하여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긴 안목에서 보면, 두 사상적 흐름이 물과 기름처럼 그렇게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전통도 이성을 무시하지 않으며, 어느 흐름도 경험과 언어를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심지어 ’진리‘라는 단어는 양자를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 보자. 왜 하필 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사일까? 당연히 현대 영미 철학사가 다른 편에서 대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분히 인위적 구분이 가미되어 있을지라도 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사가 현대사회에 유산으로 남겨준 특별함이 있다. 이 포스팅에서는 그 고유함과 특별함을 추적할 것이다.

현대 영미 철학사에 비트겐슈타인, 화이트헤드, 토마스 쿤, 존 롤스, 매킨타이어, 왈쩌, 퍼트남, 로티, 촘스키, 프레이져, 제임슨 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면, 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사에는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 아도르노, 하버마스, 미셸 푸코, 레비나스, 자크 데리다, 슬로터다이크 등의 이름이 거론된다. 우리와 동시대를 함께 호흡했고, 여전히 살아 있는 철학 이론들이기에 현대 인간의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이해하는데 좋은 통로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 철학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함께 다뤄볼 것이다.

 

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자들: 데리다, 레비나스,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

 

 

키워드로 정리해 보자. 진리, 이성, 주체, 이 세 키워드가 현대 유럽 철학의 흐름을 결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원래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진리, 이성, 주체는 철학의 중심부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방법론에서는 차이가 있다. 진리, 이성, 주체, 키워드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현대 영미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탐구하는 방법론에서 현대 유럽철학과 결을 달리하는 것이다. 도대체 과거에는 어땠길래 현대는 과거와 연속적이면서 단절을 보이는 것일까? 이 포스팅은 그 방법론의 선회를 순차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다.

진리와 이성에 대한 질문이 현대 유럽 철학의 초반부에도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 그럼 그 이전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과정이 상이하다. 길을 찾는 방법도 다르다. 과거 진리와 이성의 중심부에 놓여 있었던 보편타당한 그 무엇은 일단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중심부의 권력에 밀려 여분 혹은 잉여로 간주되었던 삶의 다양한 자락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중심부는 무엇이고,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주변부로 밀려 무력화되었던 것은 무엇일까? 다음 포스팅의 주제가 될 것이다.

 

이 장은 사전 작업 정도로 정리해 보겠다. 먼저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본다. 철학의 출발점은 어디였을까?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철학은 어떻게, 왜, 어떠한 상황에서 시작된 것일까? 매우 근원적인 질문이자, 나름의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받았을 법한 질문일 테니까. 사실 답변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철학이란 대체 어떠한 학문일까? 앞서 우리는 이미 진리와 이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를 제시하였다. 어떤 맥락에서 이러한 단어가 등장할 것일까?

 

2.

태초에 로고스가 아니라 이미지가 있었다. 인지 혁명을 일으킨 인간은 문자를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림을 통해 사물을 상징화할 수 있었다. 문자의 역사가 불과 몇천 년이라면, 이미지의 역사는 수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림을 통해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을 묘사하는 것으로 처음 인간화의 첫발을 내디뎠다. 각종 동물벽화에 등장하는 자연의 모습속에 그들은 무엇을 남기려고 했을까? 동물적 본능처럼 인간의 눈으로 본 자연은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화산폭발, 지진, 변덕스러운 날씨, 해일 등 자연의 위력은 초창기 인류에게 극복할 수 없는 신성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인류의 태도는 숭배와 복종이었다.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이다. 경외심 앞에서 희생제물의 요구는 당연하였고, 종종 자신을 바치는 것이 신을 경외하는 최고선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모든 인류의 문명에는 이러한 원형적 의식이 존재하였다. 신적 속성을 지닌 자연을 흉내 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은 권력자의 신권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신화의 시대 혹은 종교의 시대로 부른다.

근대에 이르기 전까지 초월적 존재를 통해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은 가장 인기있는 해석적 패러다임이었다. 그 뒤에 우리에게 익숙한 인본주의가 출발한다. 휴머니즘이라는 다른 표현을 가진 인본주의는 대략 14세기 경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학, 수사학, 웅변술, 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중세를 지나면서 상실했던 자유로운 정신의 재생(renaissance)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본주의를 종교의 시대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간주의 시대라고 보면 사태파악을 할 수 없다. 신의 자리를 인간이 대체하였다고 보는 관점도 지나친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동물이 아니다. 개인의 일생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 인간의 문화적 행동 속에는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길들여진 습관이 하나 둘이 아니다. 사실 근대의 인본주의는 일방적 숭배에서 신이 정해놓은 세계 질서에 인간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선회한 것뿐이다. 이때 이성이 큰 역할을 수행한다. 신이 질서가 무엇이며, 우리는 그 질서에 어떻게 참여하고 보존할 수 있는지, 그 답변을 이성이 수행한다고 믿은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맹목적 이성에서 합리적 이성으로 전환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때부터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존엄성, 이성의 초월성 등이 신이 인간을 선택하였다는 증표로 통하게 된다.

종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위협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유물론의 대두로 보는 게 정설이다. 일명 자연주의 시대가 본격적 도래이다. 근대의 자연주의는 고대 그리스 자연주의 철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근대 철학자 라이프니츠(1646~1716)와 그의 제자 C. 볼프(1679~1754)에 의해서이다. 18세기 말 프랑스 유물론을 거쳐 19세기 전반에 L. 포이어바흐(1804~72), K. 마르크스(1818~83), F. 엥겔스(1820~95) 등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교화되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유물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한 기념비적 판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진다. 초월적 존재가 점차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그 자리에 물질의 현상 혹은 물리법칙이 등장한다. 유물론에 이어 실증주의, 과학주의 등 오늘날 우리가 학문의 기초로 알고 있는 세계관이 이른바 자연주의이다. 현대 과학 문명의 핵심인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자연주의의 정점이다. 모든 것이 계산될 수 있다는 신념은 인간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맞이한다. 자본주의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인 시대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도 머니는 최고였다. 자본주의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구축된 경제적 사회 구성체를 의미한다. 사회적 활동의 중심은 소비와 성장이다. 안정적 이윤 추구를 위해 소비에 의해, 소비를 위한, 소비의 사회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소비의 여력이 곧 개인의 매력으로 통하는 사회로 본격 진입한다.

 

3.

이제 다시 우리의 원래 본래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철학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철학의 역사라면 모를까, 철학 그 자체를 묻는 일은 원하는 답변을 기대하기 어렵다. 철학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라는 것이 대체로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맥락과 관점에 따라 상대적 답변만이 가능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중세, 근대, 현대, 시기별로 혹은 지역별로 답변이 상이할 수 있다. 행여 이 질문을 문제로 삼아 시험이라는 것을 본다면, 정답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 유럽 철학을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갖는다. 고대도 아니고, 근대도 아닌 바로 현대의 특징을 알아야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현대 유러 철학에 입문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유럽 철학은 자신의 시대를 사유한다. 자본주의는 당연히 비판과 회의의 대상이다. 키워드는 인간 소외이다. 자연주의, 과학주의, 소비의 시대가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다. 기계의 발명과 대량 생산 시스템의 구축은 화려한 물질문명의 시대를 열었지만, 인간을 기계와 조직의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부작용도 낳는다. ‘인간이란 무엇으로 사는가?’ 말년의 톨스토이가 집필했던 단편 소설이다. 문학으로 자신의 시대를 문제 삼았던 걸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도 사유의 대상이 된다. 합리적 행동의 중심부에는 항상 이성이 있었다. 현대는 특히 이성을 승리를 자축하며 샴페인을 터트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축배를 내려놓기도 전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그리고 줄줄이 세계는 대형 사고를 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수차례에 걸친 아랍 전쟁, 유럽 한복판에서 터진 코소보 전쟁, 여기에는 한국 전쟁도 빼놓을 수 없다. 규모와 참혹함, 사상사 수에서 현대 수십 년간의 전쟁사는 앞선 수천 년을 압도할만큼 전 세계가 전면전의 양상을 띠었다. 과연 우리는 현대를 이성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대체 이 참혹한 갈등은 도대체 어느 정신에서 유래한 것일까? 이성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되는 바로 그 인간으로 이끈 원동력이 맞는 것일까? 과거 수십 년간의 세계적 현상 앞에서 현대 유럽 철학은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당위를 갖게 된다. 명석하고 판명하게(clear and distinct) 것이란 이제 더는 없다. 특히 우리가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이 정말 그러한지, 행여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무엇인지. 과거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반역의 발걸음을 과감하게 내딛게 된다.

특히 길을 찾는 사유의 방법론에서 현대 유럽 철학은 과거와 결별하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대표적인 키워드가 진리이다. 진리는 사물의 본질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전통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실체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걸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현상의 세계를 진리가 아니라고 외면해야 할 어떤 이유는 없다. 오히려 현대는 과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현상을 진리에 접근하는 중요한 통로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현상학’이라고 부른다. 후설에서 시작한 현상학의 미미한 흐름은 향후 거대한 물결이 되어 현대 철학의 기초로 자리 잡게 된다.

본질이라는 단어에도 균열이 감지된다. 사물의 본질,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언어사용이다. 늘 철학은 본질을 추구해 왔다. 그래서 자타가 공인하는 학문의 왕자라는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런데 본질은 항상 우선적일까? 매우 생뚱맞은 질문으로 여겨질 것이다. 본질을 우선순위에 놓는 동안 우리는 ‘지금’ 그리고 ‘여기’를 외면해야 한다. 늘 본질 혹은 목적이 우선순위에서 앞자리를 차지했기에, 현재는 과거 혹은 미래로 흩어지기 일쑤였다. 그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역성의 현상도 일어난다. 실존 철학이 그것이다.

근대성에 대한 비판도 현대 유럽 철학을 해석하는 중요 통로이다. 이성에 내재한 폭력적 권력성향, 그 권력이 행하는 폭력적 속성을 집요하게 추적하려는 사상도 등장한다. 일명 계보학의 이름으로 이성의 과거 행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현대 철학자가 니체의 적자였던 미셸 푸코이다.

 

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을 한 결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동일자와 타자, 개념과 생성, 존재와 비존재, 동일성과 차이 등 서로 대립하는 지적 풍토가 시간적 편차를 두고 서로 중첩되며 의미의 집합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성을 주장하기에는 너무 다르고, 다름을 주장하기에는 그 지적인 결이 너무도 닮아 있는 두 진영은 현대 철학의 양대 축임에는 분명하여 보인다. 그래서 수용과 대립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은 학문적으로 의미가 있다. 특히 이 포스팅은 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적 흐름을 검토하며 그 미묘한 착종 관계를 추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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