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사 5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을 넘어서 이제 우리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으로 넘어간다. 현대 독일 철학을 대표하는 두 거두이다. 후설과 하이데거는 인연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엄격한 의미의 사제 간은 아니었지만, 프라이부르크 대학 조교로 있으면서 하이데거는 후설로부터 현상학을 배웠다.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의 속표지에는 ‘후설에게 헌정’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둘의 관계가 틀어진 걸까?
인간관계가 그렇다. 진정한 적은 늘 내부에 있기 마련이다. 하이데거가 심혈을 기울여 헌정한 저서에 후설은 냉정하다 못해 혹독한 평가를 가한다. 현상학적 언어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유대계였던 후설은 나치의 등장과 함께 학문적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하이데거는 자연스럽게 후설과 거리를 두게 된다. 문제는 왜 현상학이 아니고 형이상학일까이다. 그 비밀을 이번 포스팅에서 살펴볼 것이다.
이번 포스팅부터 2회에 걸쳐 걸쳐 하이데거의 논문,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다루게 된다. 이번에는 그 서론을 분석할 것이다. 분량은 몇 페이지 되지 않지만, 등장하는 개념과 내용의 어려움은 실로 어마무시하다. 언어의 난해함은 차치하고라도 내용적 맥락은 가히 욕이 나올 정도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독자와 무슨 억한 감정이 있길래 이런 사디즘적 언어를 구사하는 것일까?
사실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은 더 심하다. 철학자 중에서 하이데거를 혐오하는 학자들이 꽤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언어의 난해함을 거론할 정도이니 필자의 주관적 판단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독일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나면, 그렇게 난공불락의 성은 아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분석에 임해보자. 왜 현상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일까? 어쩌면 하이데거의 저서를 혹평했던 후설이 정확하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부터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에 관심이 많았다. 현상학이 아니었다.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축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그 새로운 성을 구축하는 언어가 현상학적이다. 후설에서 배운 현상학을 방법론적 분석기술로 나름 승화시킨다.
서론: 형이상학의 근거로 내려가기
이 책의 원형은 사실 논문이다. 독일에서는 교수로 임용될 때, 전통적으로 공개 강의를 하게 되어 있는데, 그때 강연 원고로 사용된 문건이다. 이러한 언어로 대중 강연을 했다니 믿어지지 않지만, 일단 팩트이다. 이 원고에 서론과 결론이 차후에 첨부된다. 그렇게 해서 단행본으로 출판된 책이 바로 이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다. 이 책의 5판이 출판될 때 첨부된 서론에는 ‘형이상학의 근거로 내려가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왜 현상학이 아니라, 여전히 형이상학일까? 철학이 모든 학문의 근원이라면, 형이상학은 그 근원에서도 뿌리에 해당한다. 철학의 이러한 원형적 사고는 전통 형이상학이나 그것의 한계를 지적하는 현상학적 전통에서나 공통분모로 간주할 수 있다.
현대 유럽 철학을 소개하는 포스팅에서 필자는 철학과 형이상학이 동전의 양면처럼 운명을 공유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 번이라도 철학적 사유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형이상학자였을 것이다. 더욱이 인간적 삶이 무엇인지를 성찰해 보았다면, 형이상학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러한 일반적 상황에 하이데거도 시종일관 공감을 표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철학적 상상력이 행했던 존재에 대한 모든 사유는 곧 형이상학이었다. 전통 형이상학의 발자취를 뼛속까지 증오했던 니체조차도 하이데거의 눈에는 형이상학의 전통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로 보일 정도였다.(Nietzsche II, 192)
그러나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폐기가 아니라 극복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기 바란다. 형이상학의 부정이 아니라 더 근원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바로 이 ‘근원적’이라는 단어를 하이데거는 현상학으로부터 배웠다.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뿌리라는 용어는 근원이 아니다. 뿌리는 독자적으로 자양분을 공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양분의 원천은 그 뿌리가 묻혀 있는 토양이다.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 이 차이를 무시하게 되면서, 형이상학의 역사는 자신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도 그것을 수행할 능력도 상실하였다.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를 망각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형이상학의 탄생
먼저 형이상학의 탄생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형이상학적 이성은 자연적 본능을 넘어 인간의 시선을 초월적 세계로 향하게 했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이 차이는 절대 작지 않다. 일반적으로 전통 철학은 초월의 의미를 종교적 영역에서 찾곤 했다.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란 절대자인 신(神)밖에 없다는 식이다. 이 생각은 오랫동안 서구 지성사를 지배했다. 이론적으로 보면, 초월적 존재인 신은 인간의 경계 밖에 서 있는 외재적 초월자이다.
언젠가부터 인간의 내부에서도 초월이 감지된다. 외재적 초월이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내재적 초월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의식에서 형성된 듯하다. 자연적 본능에서 벗어나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을 때, 인간은 세계를 향해 마음이 연다. 타자에 대한 배려, 존중, 다름과 차이에 대한 인정 등은 전형적으로 내재적 초월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자신 안에서 일종의 변화와 비약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 형이상학의 특권인 초월의 의미를 이렇게 인간적으로만 해석하면 다소 무리가 따른다. 기존의 방식과 결별하고 초월에 상응하는 정당화 과정이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내재적 초월은 이론적 구성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봐야 하기에 엄밀한 자기 성찰과 반성을 요구한다. 하이데거는 초월을 해석하는 일에서 전통 형이상학과 완전히 결별한 것일까? 하이데거가 이 질문을 직접 받았다면, 어떤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의 답변은 긍정도 부정도 아닐 듯하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서양 철학의 주된 관심사는 변화무쌍한 자연에 맞서 보편적이고 영원불멸의 세계를 확인하는 데 있었다. 별자리를 보며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고 자연의 질서를 사유했던 고대인은 철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자연스럽게 형이상학의 과제도 세계의 조화를 이미지로 확인하고, 의식적으로 내면화하는 일에 맞춰져 있었다. 이성은 눈에 보이는 변화무쌍한 현상 너머에 불변하고 단일한 세계가 있을 거라는 신념을 세대에 걸쳐 인간 유전자에 깊이 각인시킨다.
형이상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로 간주되고 그 어떤 응용 학문보다 권위를 갖게 된 이유가 바로 이러한 합리적 사고에 있었다. 형이상학은 바닷가에 무수히 널려 있는 모래알처럼 우연히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개별적인 것을 개념으로 묶어서 정의(定義)할 줄 알았다. 그리고 최상층부에 보편적 개념을 올려놓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모든 사물의 이면에는 본질이 놓여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에 실체라는 이름을 부여했을 때, 형이상학은 왕 중의 왕, 철학 가운데 철학으로 등극하였다.
자연과 관계를 맺는 이러한 인간적 방식을 우리는 흔히 해석이라고 부른다. 형이상학의 사유는 해석의 최고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역사도 형이상학의 편이었다. 자연의 불가피성과 우연성이 초래한 정신적 불안를 극복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해석은 이론적으로 중무장을 하기 시작한다. 자연의 질서를 체계적 패러다임에 고정시켜 예측하고 정형화하려는 노력이 대표적 예이다. 여기서부터 역설이 발생한다. 인간의 정신은 주변 세계를 합리적 질서에 따라 진행되는 필연적 사건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형이상학과 함께 자연적 존재인 인간의 운명은 필연적으로 자연을 왜곡해야만 하는 비운의 운명으로 변한 것이다.
특히 사회적 삶이라는 실천의 영역에서 자연을 극복하려는 형이상학의 노력은 실로 막대하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인류 역사의 물꼬를 돌려놓았던 자유와 정의, 평등과 인간 존엄성이라는 대의는 인간 사회를 합리적 이념으로 해석하는 형이상학의 결정판이다. 자연적 동물이 생태계의 먹이사슬에 적응하며 살아간다면, 인간의 자기 보존본능은 형이상학의 룰렛에서 랜덤으로 뽑히는 이념으로 움직였다.
왜 새로운 형이상학인가?
결론적으로 자연을 넘어서려는 형이상학의 역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로 간주할 수 있겠다. 호모 메타피지쿠스(Homo metaphysicus), 즉 형이상학의 정신은 형이상학이 인간의 본질임을 가리키는 상징적 통찰이다. 인간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며, 그 분리에 기원을 둔 내재적 불안을 극복하게 된다.
그런데 형이상학의 여정이 항상 탄탄대로였던 것은 아니다. 내적인 평온함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그러하다. 형이상학적 자기 이해가 인간 실존에 내재한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론적 구성물을 통해 강요된 측면이 없지 않다. 자연의 우연성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사유가 불완전한 측면도 있지만, 애당초 형이상학이 자신에게 부여한 임무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이 아니었을까?
형이상학적 사유가 왜곡의 길을 걷게 되는 이유가 짊어진 과제의 무거움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의미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과제의 무거움으로부터 도피, 그것이 폭력적으로 자신과 세계를 해석하기 시작한 원동력이었다는 의미이다. 철학사에서 보면, 하이데거가 처음으로 시도했다고 알려진 존재와 존재자의 혼동이 등장하는 맥락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인간적 삶의 한가운데서 해석한 몇 안 되는 철학가 중의 하나이다. 전통 형이상학이 삶의 바깥에서 성급히 인간의 존재와 자연의 의미를 닫아 버렸다면, 그것을 문제삼은 하이데거의 언어는 매우 현상학적으로 진행된다. 엄밀한 방식으로 인간의 ‘있음의 방식’을 기술하려는 언어는 실로 난해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는 묻는다. 도대체 왜 인간적 삶의 내면에서 출발한 형이상학이 스스로 자신의 근거를 떠나 방황하는 역설의 역사를 만들 수밖에 없었을까?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 존재자의 ‘있음의 방식’에 머물지 못하고 궤도 이탈한 원인을 존재와 존재자의 혼동에서 찾는다. 형이상학의 전통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렇게 시작한다.
“형이상학은, 그것이 언제나 존재자로서의 존재만을 표상하고 있는 한, 존재 자체를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 철학은 자신의 근본바탕에 집결된 것이 아니다. 철학은 언제나 이 근본바탕을 떠나고 있는데, 그것도 형이상학을 통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결코 그 근본바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사유가 형이상학의 근본바탕을 경험하려고 시도하는 한, 이 사유가 오직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만을 표상하는 대신에 존재 자신의 진리를 사유하려고 시도하는 한, 그 사유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형이상학을 떠난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아직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볼 때 형이상학의 근본바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여전히 근본바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 만일 그것이 그것 자체로부터 경험된다면 - 아마도 전혀 다른 어떤 것일 것이며 아직도 말해진 적이 없는 어떤 것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형이상학의 본질 역시 형이상학이 아닌 어떤 다른 무엇일 것이다."(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매우 어려운 문장이다. 차라리 독일어 원문으로 보면, 더 이해가 빠르다. 독일어와 한국어의 차이가 독해를 더 어렵게 하는 듯하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형이상학의 과제는 존재의 근거를 묻는 일이다.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의 근거를 묻기보다 부단히 존재자를 또 다른 존재자로 둔갑시켜 해석했을 뿐이다. 속된 말로,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러한 허튼짓이 철학이 스스로 근원을 떠나도록 만들었다고 본다.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근원을 추구했던 형이상학적 사유가 근원을 스스로 발로 차버렸으니까.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 이른바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기 위해 기존의 형이상학을 과감히 떠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재 안에 머물러 있음
존재의 근거를 사유한다고 했지만, 그저 대상적 사유에 머물렀던 전통 형이상학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하이데거의 눈에 그것의 극복은 필연적으로 보인다. 극복이란 폐기처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묻고 대답해야 하는 존재이다. 존재의 진리를 과제로 삼은 형이상학이 인간 정신의 본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자연의 직접성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자신의 ‘열려 있음’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이성의 힘이자 형이상학적 사유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이 편협하게 닫혀버린 정체성을 우리에게 강요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저항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실존의 목소리로 해석한다. 감옥에 갇힌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마음의 문을 열고 세계와 마주하는 인간 존재의 근거라는 것이다.
이 근거로 진입하는 첫 관문으로 하이데거는 심리적 현상 중에 하나인‘염려’에 주목한다. 이 또한 의식의 학인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에서 배운 현상학의 언어이다.
하이데거는 염려가 인간이 자신을 해석하기 이전부터 발생한 근원적 사건임을 강조한다. 사실 염려가 실존의 근원적 모습이라는 주장은 철학적이라기보다 인간학적 측면이 훨씬 강하다. 인간은 고정된 정체성을 지닌 채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불투명하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무(無)로부터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의 힘에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주어진 것임과 동시에 과제로 부과된 중첩된 존재라는 의미이다.
실존에 부과된 과제는 흔히 일상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의무처럼 실재적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존의 과제는 어떤 결과에 따라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실존은 과제 그 자체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실존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어쩌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과정이 인간의 실존에 담긴 비밀일 것이다.
종종 우리는 사회적 가면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수 있다. 페르소나의 인상은 너무 강력해서 삶 전체를 집어 삼키고도 남는다. 누구와 혈연으로 맺어져 있고, 어떤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는 누군가에 대한 좋은 정보이다. 하지만 사회적 페로소나를 ‘있음’으로부터 오는 존재의 의미로 착각하게 되면, 삶이 그대를 제대로 속여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하게 된다.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은 언젠가 우리를 떠날 것이고, 그때 불현듯 엄습하는 공허함으로 우리는 정체성에 심대한 상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상실의 시대’가 시작하는 시점이다. 존재의 망각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망각이다.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이 실패한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는다. 형이상학은 강력한 이성의 힘을 바탕으로 ‘있음’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존재의 ‘열려있음’, 그 심연에 머물러 있을 만큼 인내심이 훌륭하지 못했다. 인간의 실존에 담긴 ‘있음’의 그 풍요로움을 만끽하려면, 실존의 열려있음에 우리가 더욱 익숙해져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조언한다. 존재에 머물러 있으면 있을수록 존재 자신이 어떻게 스스로를 알려오고 감추며, 내어주고 빠지는지를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존재의 진리를 사유할 수 있을까? 진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의식과 외부 대상과의 일치로 파악되었다. 내면과 외면의 완벽한 일치를 말한다. 이른바 진리 대응설로 불렸던 이론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태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무언가가 드러나야 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진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가 사실 ‘드러남’이라는 어원을 지니고 있다고 언급한다.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기 위해 우리가 일차적으로 내디뎌야 할 지평은 의식과 사태의 일치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드러나는 지평에 머무를 수 있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논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동안 철학사는 진리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 전 단계에 머무르며 진리를 찾았다고 몽니를 부린 셈이다.
형이상학의 근본 문제
형이상학의 근본 질문은 하나이다. “도대체 왜 무가 아니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근대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즐겨 썼던 표현이다. 전통 형이상학의 극복을 꿈꾸었던 하이데거도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성급하게 답을 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왜 무가 아니라 존재하는 걸까? 내가 존재하는 제일 원인과 목적을 찾으려는 노력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하다. 불같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운명이 단 한 명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직업적 성공이 생의 유일한 목적일 수도 있다. 성적에 목매는 학생에게 학습 능력의 차이는 행복을 부르기도 혹은 절망의 원천이기도 하다.
삶을 일정한 시간으로 잘라내어 그 단면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가 찾은 다양한 삶의 근거들이 존재의 형성에 중요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사건도 생각보다 많다. 나의 존재는 시간과 함께 펼쳐지는 사건들의 총합, 그 이상이다. 그 ‘이상’ 속에 존재의 의미가 담겨 있다.
어떤 사건은 가볍게 스쳐가며 기억에서 사라지겠지만, 어떤 사건은 평생을 걸쳐 나의 실존과 동행할 것이다. 고통과 슬픔을 동반한 기억은 종종 나의 실존처럼 굳어질 수도 있다. 무심코 스쳐 지나간 사건조차 우리의 무의식은 선명하게 그것을 기억하여 각종 신경증의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사건들이 지니고 있는 경중(輕重)을 따지고 있는 걸까? 형이상학은 숱한 사건들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사건을 골라내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걸까?
유감스럽게도 형이상학의 일차적 임무는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숱하게 우리를 스쳐가는 사건들이 하찮거나 부차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시간과 더불어 경험하는 숱한 사건들은 모두 중요하며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면에 높인 근원적인 지평을 밝히는 작업에 있다. 형이상학이 진정으로 최종적 근거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면 이러저러한 사건에 집착하기보다 그 사건이 어디로부터 출발하였고 어떠한 의미로 흘러가지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훨씬 근원적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저서가 다루는 제일 큰 주제와 만나게 된다. 다음 주차에 다루게 될 주제인 무(無)의 현상이 그것이다. 그 예고편만 간단하게 살펴보자.
무엇이 왜 있는 것인지 그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있음’으로 시작할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이는 동어반복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대답하기 위해 ‘여기에 있음’이라는 지점에서 출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우리는 존재의 근원을 ‘여기에 없음’으로부터 찾아야만 한다. 이는 논리적인 사안이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무의 현상을 다루는 방식은 논리적 사유를 넘어선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무라는 현상은 단순히 있음의 반대편에서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는 단순히 있음의 부정이 아니다. 무의 현상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의 근원과도 같다. 이른바 존재자의 존재가 머무르고 있는 신비스러운 원천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원천에 기대어 내용상 공허할 수밖에 없는 ‘있음’이 어떻게 의미로 채워질 수 있는지를 탐구해 간다. 다음 포스팅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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