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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현대 독일-프랑스 철학사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by 지렛대 2023.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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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사 3


 

도입

이번 시간은 현대 독일 프랑스 철학사 세 번째 시간이다. 이번 주 주제는 현상학에 대한 개론이다. 현대 유럽 철학의 입구에는 현상학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마치 현상학을 모르는 놈은 이곳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선언하는 듯 하다.

옛날 플라톤은 자신이 세운 아카데미아의 현판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는 문구를 걸어 놓았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철저하게 기하학적 사고를 기본 바탕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현대 유럽 철학도 입학 조건을 제한한다. 현상학을 모르면, 현대 유럽 철학이라는 사하라 사막을 나침판 없이 지나는 것과 같다. 자칫 신기루처럼 가질 수 없는 힘에 홀려서 다 말아먹을 수 있다. 현대 철학에서 현상학의 기세는 그만큼 강렬했다.

 

이 포스팅에서 우리는 현상학 개론을 진행할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현상학에는 개론이라는 말을 쓰기가 곤란하다. 개론이든 심화든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상학은 입문하기가 어렵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애용하는 인터넷 백과사전에 등장하는 현상학에 대한 정의이다.

 

“현상학 사조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현상학은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즉 가능한 한 개념적 전제를 벗어던지고 그 현상을 충실히 기술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실증주의와 전통적 경험론과 비교해서 현상학은 경험의 실증적 자료를 무조건 존중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이 자료를 감각 경험에 제한하지 않고 관계나 가치 등 비감각적, 범주적 자료도 직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인 한 허용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현상학은 보편자를 거부하지 않는다. 현상론과 달리 현상학은 현상과 실재를 엄격하게 구분하며, 현상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좁은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경험을 포기하더라도 개념적 추론을 강조하는 합리론과 달리 현상학은 개념과 모든 선천적 주장이 직관에 기초하고 직관으로 검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 백과사전)

 

간략한 정의이지만, 명확한 요약이다. 최소한 전공자의 눈에는 그러하다.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 이해도 그러할까? 만약 이해가 된다면, 아마도 그는 언어에 천재적 이해력을 소유한 사람일 것이다. 필자는 보통 사람이라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나는 확실해 보인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인용한 문장인데, 맨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하여 시의성 있는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이거는 아닌 것 같다. 전문 필진이라는 어구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쉽고 정확하다는 표현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사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이보다 훨씬 일반적인 언어로 사태를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해석하는 자의 특권이자 과제이다. 주석에 매달리는 훈고학을 해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전문가라는 명함을 내밀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현상학을 만들고 발전시킨 원조 철학자들의 글이 쉽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어렵다. 그래도 그들은 용서가 된다. 기존의 익숙한 사고의 틀을 뚫고 새로운 언어를 생성하려면, 아무래도 낯선 사고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낯선 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니, 그 언어 역시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우리는 최대한 일반적인 언어로 현상학에 진입하도록 시도할 것이다.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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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갈등의 원천

철학사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사상적 파편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현대 유럽 철학을 구성하고 있다. 현상학은 현대 유럽 철학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사상적 흐름이다. 정확하게는 현대 유럽 철학의 무의식, 즉 토대에 해당한다.

그럼 우리 모두는 현상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까? 그럴 필요는 없다. 다만 현상학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지 못한다면, 현대 유럽 철학이라는 깊은 늪에 빠져 자칫 허우적댈 수 있다.

도대체 현상학 이전에 철학적 경향이 어떠했길래 현상학이 그 지적인 전통을 부수고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일까? 미국에는 서부개척 시대라는 특별한 시간이 존재했다. 카우보이들이 소 떼를 몰거나, 광부들이 대박을 꿈꾸며 금광이나 사금이 나오는 강가를 헤매는 장면, 옛날 영화에는 참 많이 등장하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현상학의 역사를 이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특히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다. 현상학이 등장하기 이전 철학사를 먼저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겠다.

전통 철학은 크게 다섯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물론 현대 학문의 작위적인 구별법이다. 형이상학(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미학, 논리학이다. 철학을 전공하는 독자에게는 대부분 전공 필수로 개설되어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형이상학은 당연코 제일 철학이다. 우리는 앞서 언급하였다. 형이상학은 철학 중에서도 철학이다. 정확하게는 왕년의 두목이었다. 머리 위에 진리의 왕관을 쓰고 권좌에 앉아있다. 형이상학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고 답하는 학문이다.

서양 철학의 시조 격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중세철학의 대부 토마스 아퀴나스, 근대를 상징하는 데카르트, 칸트, 라이프니츠, 헤겔 심지어 현상학을 출발시킨 후설과 하이데거에게도 형이상학의 무게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일까? 방법론의 차이다. 그래서 처음 현상학의 비밀은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론의 획기적 전환에 있다. 자세히 살펴보자.

진리에 대한 물음은 철학의 세계에 한 번이라도 발을 담가 본 사람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담겨 있길래 그러한 것일까? 필자도 처음 이 학문에 마음을 두었을 때 진리에 대한 갈망이 동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너무 오래되어서 초심을 잃었다.

 

 

 

그런데 초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자의 나이에는 초심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이 나이에 고정불변이라는 하나의 진리를 고집하면, 꼰대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진리가 아무리 본질의 이름으로, 실체의 모습으로, 선이나 정의의 얼굴로 변신을 해도 그 시대적 상대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제는 그것을 알고 있기에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 반지를 탐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그렇다면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를 현상학에 드리운 분위기로 간주하면 될까? 그렇지는 않다. 어쨌든 초기 현상학은 진리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발상 전환을 시도한다. 이 또한 그 시대의 요청이다. 현상학 이전까지 진리를 추구했던 철학의 전반적 노선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길을 잃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진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항상 ‘하나’라는 상징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진리가 여럿일 수는 없다. 문제는 그 하나의 진리가 천의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영화배우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팔색조 매력의 소유자가 된다. 그러나 진리가 천의 얼굴을 하면, 반드시 갈등과 분쟁이 발생한다. 진리는 사유의 세계에서 갈등의 원흉이다.

 


현상학의 등장 배경

신화와 종교의 시대가 지나고, 근대는 본격적으로 사상의 춘추전국시대를 맞게 된다. 선두주자는 당연코 실증주의이다. 수학과 과학의 사고가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수학의 발달, 과학의 발달은 자연을 더 이상 숭배가 아닌 과학적 분석이 가능한 조작의 대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유물론이 승기를 잡는 시기이기도 하고, 소크라테스 철학 이전 자연주의 철학의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학은 어떨까? 이 시대는 역사학도 독립된 학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다. 기원에 집착하는 본능적 경향이 이때부터 형성된다. 원인과 결과를 분석의 틀로 삼는 실증주의의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종착역의 비밀을 출발점에서 찾으려는 원초적 본능을 의미한다.

이쯤에서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과가 등장한다. 흔히 마음의 학으로 불리는 심리학은 학문이 분화되는 최후의 시점까지 철학에 묶여 있었다. 심리학이 철학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독립한 이유는 간단하다. 철학이 과도하게 추상적 개념에 목을 매면서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철학은 개념의 학으로 통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보편타당한 전제로부터 세상을 추론할 수 있어야, 마치 수학 공식처럼 절대로 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종류의 학문이 분화를 시작하면서, 철학은 위기를 맞는다. 더욱이 진리를 추구하며 갈등을 일삼았던 전통 형이상학은 가장 큰 타격을 입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의 과제는 개별 분과학문으로 흩어지고 이제 철학의 권위는 허울만 남게 된 것이다.

이때 철학과 유사한 심리학이 세간의 관심을 받는다. 심리학은 인간이 관계된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관해 연구한다. 특히 인간 내부의 심리 현상을 이론적으로 분석한다. 진리가 꼬장꼬장하게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반해, 심리학은 자연적 심리 현상을 바탕으로 인간을 유연하게 이해하려고 한다. 심리는 윤리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적 판단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인간의 인식을 단순한 심리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생긴다. 시대적으로 보면,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에 가장 강력한 적수가 등장한 셈이다.

 

이때 후설이 철학계에 혜성처럼 구원투수로 등장한다. 앞면에 현상학을, 뒷면에 철학의 구원을 새겨 넣은 깃발을 높이 올린다. 그렇다. 후설 현상학의 과제는 전통 형이상학의 구원에 있었다. 이른바 시대의 적으로부터 진리를 구원하려 했다. 하지만 과거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무릇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다. 그가 선택한 새 부대는 방법론적 선회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며 과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면, 후설은 현상학을 통해 발상 전환에 성공한다.

 


방법론적 선회

현상학에서 인식의 출발은 진리 혹은 본질이 아니다. 최소한 방법론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각자가 진리를 대변할 수 있는 권리의 시대에 진리란 전쟁의 원천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다. 개인은 세계와 마치 한 몸처럼 서로 얽혀 있어서, 그가 선언하는 진리란 시대적, 공간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이념도, 어떤 사상도 하나의 지평, 하나의 맥락에서만 그 유효성을 증명할 수 있다.

현상학은 현상 그 자체에서 시작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식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일 수 있으니 일단 괄호로 묶어서 배제라고 조언한다. 그것이 그릇된 인식이어서가 아니라, 아직 증명되지 않은 단순한 전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직관을 서로 옳다고 끝까지 우기면, 결별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래서 일단 현상을 출발점으로 제안한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현상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현상을 직시한다는 것은 현상에 머문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전의 판단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고 엄밀한 관찰로 나아가자는 협상이다. 그렇게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이 후설 현상학의 상징이 되었다.

이제 독자가 질문을 던질 시간이다. 무엇을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바둑에는 長考(장고) 끝에 惡手(악수)를 둔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일상에도 종종 해당한다. 너무 오래 고민하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오답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일까? 후설은 이성의 지원군인 ‘환원’을 전격 투입한다. 후설은 이것을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불렀다. 환원은 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자, 대상의 본질에 이르는 인간적 통로이다. 인간적 통로라는 말에 주목하자.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주관적 의식과 대상이 맺는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있다. 즉 안다는 것은 대상과 관계를 맺은 내면의 전모를 정확하게 직시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여전히 우리는 현상학이 무엇이고, 현상학적 환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앞서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설명한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후설은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철학을 위기에서 구원한다는 것일까?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래서 구체적인 현상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고자 한다.

 


다양한 해석

전 세계가 우크라이나 사태라는 블랙홀에 빠져들어 가고 있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결과을 맞게 될까?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성적 판단으로는 적당한 선에서 서로 타협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변수가 우리 앞에 놓여 있을지, 인간의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동맹국 간의 블록화가 격화되면서 우크라이나를 넘어 한반도로 확전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일단 우리의 주제는 작금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우리가 여전히 살고 있다면, 이 사태의 본질은 비교적 간단하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식민지로 삼는 일이 아주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다. 예부터 약육강식은 자연의 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의 평가도 강자에게 매우 유리하게 적용된다. 강함 그 자체가 이미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단 우리는 관련 분야 전문가를 소환해야 한다. 역사학자는 기원을 추적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역사를 공유하는 나라이다. 뿌리는 고대 국가였던 ‘키예프루스’ 이다. 키예프는 지금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이고, 러시아는 ‘루스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분리될 수 없는 일부라는 푸틴의 말은 역사적으로는 타당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갈등이 생긴 것일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누적된 지역감정이 되겠다. 우리와 비교하면 이해가 빠르다. 우리의 철천지원수가 바로 위에 있는 북한이 아닌가.

정치학자의 눈에 비친 우크라이나 사태는 정치적 역학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어찌어찌하여 독립 국가가 된 우크라이나는 유럽과 미국에 기대는 정치에 운명을 걸었고, 러시아는 미국의 입김이 센 나토와 국경을 맞대는 일이 영 신경에 거슬렸다. 결국, 정치학자는 이 사태를 나토의 동진 정책과 러시아의 서진 정책이 극단적으로 충돌한 결과물로 볼 것이다. 사실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두고 강대국 간의 알력다툼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자는 또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돈 문제로 얽히면 반드시 사달이 난다는 옛말이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대표적인 예이다. 러시아 경제의 핵심은 천연가스에 있다. 유럽에 수출하는 천연가스로 러시아 경제가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는 원활한 수출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거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가스관을 설치했는데 이리저리 문제가 많이 생겼다. 결국, 독일행 직통선인 노르트스트림 1, 2를 설치하게 된다. 이것은 이해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라, 막대한 양의 셰일 가스를 생산하는 미국과도 이해관계가 상충한다. 돈 앞에선 성인군자가 없는 법이다.

마지막으로 심리학자에게 물어보자. 우크라이나 사태는 왜 터진 것일까? 심리학자는 푸틴의 정신 상태를 분석한다. 2000년 대통령이 된 이후로 푸틴은 20년이 넘게 러시아의 현대판 짜르로 군림하였다. 혈통이나 칼로 통치한 것이 아니다. 에너지 관련 기업을 국유화하고, 부패세력을 척결하며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약속한 것이다. 러시아 국민의 절대다수가 푸틴의 열성 팬이라면 믿어지겠는가. 그런데 왜 갑자기 전쟁을 일으킨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푸틴이 ‘오만증후군’에 걸렸다고 본다.

20년이 넘는 장기집권과 칠십이 다 된 세월의 무게가 푸틴의 영민하고 기민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푸틴이 제정신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푸틴에게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은 그저 일개 광대에 불과했고, 여전히 패권 국가인 미국과 서구 세계의 결집력을 과소평가했다. 반면 자신의 전략과 러시아 군대의 역량은 무한 과대평가했다. 심리전과 정치적 결단에서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던 한 정치인의 심적 오만함이 무모한 사태를 불렀다는 것이다.

 

이제 드디어 철학자의 순서이다. 현상학을 무기 삼아 철학자는 이번 사태의 본질을 어떻게 해석할까? 여러 학문 분야에 다 떼어주고 나니 철학이 딱히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현상학이 엄밀한 학문으로서 자신을 증명하려며, 이 사태도 어떤 식으로든 돌파할 수 있어야 한다. 현상학자의 눈에 비친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이 질문에 현상학이 답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상학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바로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사태를 분석하기 위해 현상학은 인식과 관련된 질문을 살짝 비틀어본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에게 어떻게 현상하고 있을까? 이제부터 철학은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현상학적 분석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에게 어떻게 현상하는 것일까? 이제부터는 우리의 오감을 열고 사태를 뚫어지라 직시해야 한다. 옮고 그름, 정의와 불의와 같은 일체의 성급한 가치판단을 괄호 쳐 묶어두고 우리에게 현상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기술하려는 것이다.

 

현상 1: 전면전과 영토침탈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옵션이 제한되거나 전혀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현상학적 환원: 우크라이나 정치는 결과에 대한 위험과 불확실성이 있는 경우에도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하는 방어 메커니즘에 의해 추동된다.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러시아에게도 적용되는 듯 하다.

 

현상 2: 한때 '팍스 아메리카나'의 역할로 알려졌던 미국은 이번 분쟁에서 우크라이나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현상학적 환원: 미국은 자국의 이익과 글로벌 헤게몬으로서의 명성을 유지하려는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복잡한 국가 정체성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현상 3: 놀랍게도 역사적으로 비개입주의 전략을 고수해온 유럽연합은 이번 위기 속에서 러시아에 상당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

현상학적 환원: 이러한 변화는 유럽의 집단의식 내 전쟁에 대한 뿌리 깊은 불안과 역사적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다. 많은 유럽 국가들과 우크라이나의 근접성으로 인해 EU의 접근 방식이 바뀌었다.

 

현상 4: 국제정세는 미국과 NATO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동맹과 러시아, 북한, 중국, 일부 남미 국가 등 미국 정치에서 소외된 국가들 간의 동맹이 등장하는 등 블록정치가 심화되고 있다.

현상학적 환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현대 국가의 출현은 극단적인 블록 정치 시대에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주요 원동력인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을 성급히 닫아 버리기 전에, 우리는 그 사태가 만들어내는 현상의 의미를 따질 필요가 있다. 현상학적 기술과 분석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태의 의미가 더 정교해질 수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는 처음부터 고정된 본질이 있었던 게 아니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세계 정치를 재편하고 있으며, 국가들이 복잡한 정체성 딜레마를 헤쳐나가고 확립된 지정학적 규범에 도전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마무리

현상학은 사태를 가장 엄밀한 방식으로 고찰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그로부터 그 사태가 불러오는 삶의 새로운 지평을 가장 인간적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엄밀한 관찰과 기록을 전제로 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사태 그 자체로 – zu den Sachen selbst –를 모토로 삼았다. 사물의 본질을 추구했지만, 그 방법론에서 전통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전통 형이상학은 단번에 본질을 확정했지만, 현상학은 가장 밑바닥에 출발하여 사태 그 자체에 이르고자 했다. 가장 엄밀한 학이라는 철학의 본래 위상을 찾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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