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존재와 열린 존재
끊임없이 묘사를 요청하지만, 그것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인격을 일찍이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방식 즉 ‘현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암시한 바 있습니다. 인간은 개별적 실존으로 이 세상에 ‘무엇’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누구’로서 던져졌다는 겁니다. 이 차이를 구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으로 던져졌을 경우 인간은 닫힌 존재가 돼 버리고, ‘누구’로서의 인간실존이란 곧 열려진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야!”
누군가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며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럴 때조차도 그는 자신의 생각과 행위가 항상 옳다고 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그는 자신이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 성장했으며, 이것이 본성처럼 굳어져 그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음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는『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러한 실존방식을 맏형 드미뜨리의 입을 통해 설명해 냅니다.
“친구, 친구여, 나는 굴욕에, 지금 굴욕에 빠져 있단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참고 지내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아, 엄청나게 많은 불행이 그 앞에 놓여 있는 거야! 나를 코냑이나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천박한 장교 놈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다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 형은 거의 그것만을, 굴욕에 빠진 인간만을 생각하고 있단다. 다행히도 지금 거짓말을 하거나 자만에 빠져 있진 않아. 내가 그런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건 바로 나 자신이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지.”
드미뜨리는 개별적 인격체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내적 힘과 욕구를 통해 세상을 반영해 냅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관능적 욕망과 비열함은 자신을 일정한 속성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하나의 지각이 다른 지각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주체의 능동성을 제한해 버립니다. 그는 누구보다 이러한 자신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을 일정한 속성으로 닫아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각들이 서로 전이되며 소통할 수 있는 크기는 주체가 세상을 반영하는 크기와 동일합니다. 앞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인구에 회자되는 존재자들 간의 위계질서를 책임의 관계로 해석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존재자들이 세계를 지각하는 크기가 유기체의 단계를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상식적으로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식물은 돌멩이보다 세상을 지각하는 정도가 넓을 것입니다. 하나의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나아가는 힘이 강렬하며, 내적으로는 자기보존이라는 생물학적 욕구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식물은 인간에 비해 당연히 지각의 정도가 약합니다. 생물학적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인간의 실존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지각을 닫지 않습니다. 개별자의 실존을 ‘현존재’라는 독특한 개념위에 세웠던 하이데거의 철학적 상상력이 시작하는 출발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금세기 가장 심오한 철학자를 한 명만 지목하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하이데거를 지목할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는 당연히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현대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에 하나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성격과 존재의 의미를 가장 탁월하게 해석하였다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경우에 따라서는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가장 난해한 언어로 기술되었고, 그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일반인들의 관심을 애써 밀어내기라도 하듯 지극히 독창적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창조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더욱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의 이름에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던 나치부역이라는 시대적 과오는 그가 전개했던 철학적 상상력의 진실마저 격렬한 논쟁의 한가운데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은 당연히 우리로 하여금 하이데거 사상의 본질적인 성격과 철학사적 의미를 어떻게 규정해야만 할지를 두고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는 탁월한 시대의 해석가인가요? 아니면 편협한 주관론자인가요? 혹은 그는 정치적 기회주의자는 아니었을까요? 이것은 독자의 판단에 맡길 일입니다. 그럼에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결코 지적 여분이 아닐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저서에 등장하는 사유와 삶을 결코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항상 동일한 지평에서 움직이며, 우리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주된 개념과 사유방식은 철학사와 논쟁하는 화석화된 이론이 아닙니다. 그의 철학은 ‘나’의 존재만큼이나 살아 움직이며, 지극히 원초적이고, 근원적이며 생생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언어는 나의 존재에 개방되어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의 언어는 나의 언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언어가 완벽하지 않기에, 그의 언어 또한 완벽하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이 완결되어 있지 않기에, 그의 생각 또한 완결된 구조를 지니지 않습니다. 나의 사유가 상황에 제한적이듯, 그의 사유 또한 시대적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의 저작을 거울삼아 나의 존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바라봅니다. 나의 존재의 드러남은 때로 지극히 지엽적이어서 진리를 은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폐까지도 진리의 일부라면, 나의 존재는 진리의 드러남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이데거를 딛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열어갈 수 있다면, 철학사에 그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는 사실이 결코 불경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계속 진행해 봅시다.
하이데거는 인간실존의 본질을 대상적 속성을 통해 닫힐 수 없는 열린 존재로 특징짓습니다. ‘열린 존재’를 개념사적으로 본다면, 하이데거가 선구자는 아닙니다. 철학사에 밝은 독자라면, 이미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담고 있는 쉘러의 철학을 기억해 낼 것입니다. 인간은 개별자로서 동물처럼 생물학적 본능에 갇혀 있거나, 어떤 종의 성질에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완성해 가는 ‘개방된 존재’라는 것이지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완성해 가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세상에 던져졌다는 말입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인간을 열린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철학적 인간학의 공통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겔렌(Arnold Gehlen, 1904∼1976)은 인간의 자연적 상태를 존재론적 결핍에서 찾습니다. 존재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문화는 인간이 자신의 생물학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해독된 자연이라는 것입니다. 20세기 후반 철학적 인간학의 부흥을 이끌었던 플레스너(Helmuth Plessner, 1892∼1985)는 인간실존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탈 중심성(Exzentrizität)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실존에게는 자기보존법칙이라는 생물학적 중심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 결여가 인간의 지각을 끊임없이 밖으로 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점은 명확합니다. 인간의 본성과 세계 안에서 그의 지위란 자신을 스스로 자신으로 만들어가는 능력이자 권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철학적 인간학에 등장하는 열린 존재는 상당부분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결코 철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등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현존재의 핵심을 담고 있는『존재와 시간』이 철학적 인간학의 열린 존재를 단지 재확인하는데 그쳤다면, 그 책은 그에게 철학교수직을 선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에는 철학적 인간학의 메시지를 뛰어넘는 ‘이상’(以上)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이상’을 규명함으로써,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도대체 어떻게 전통적인 철학적 인간학의 논점과 구별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이데거 또한 이 부분에 상당히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존재와 시간』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합니다. 쉘러와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면서 말입니다. 이것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의 논의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먼저 쉘러의 인격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해 봅시다.
쉘러의 인격에 대한 정의는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칸트의 이성 중심적 인격개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칸트에게 있어서 인격과 인간 존엄성의 논의는 항상 이성으로부터 연유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격이란 이성으로부터 기인된 인간의 도덕적 행위 능력과 결부되어 논증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 능력이 현상의 인과성을 뛰어넘을 수 없음을 통찰하였던 칸트에게 인간 존엄성은 필연적으로 윤리적 행위와 자유의지를 통해 열려지는 물 자체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한편 쉘러는 칸트 철학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칸트는 합리적이고 지적인 주체, 자신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근거 짓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존재만이 인격적 정체성을 얻게 된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러한 생각의 약점을 환기시킨 바 있습니다. 이성과 윤리적 행위의 논리적 주체만이 인간 존엄성을 결정한다면, 인간에 대한 단계화와 차별화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얼굴을 지니고 있는 한,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합법적 절차에 따라 보호하는 현대의 인권법은 더 이상 그 근거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쉘러의 비판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칸트의 경우처럼, 인격됨의 임의적 제한은, 그것이 어떠한 맥락을 지니고 있든지, 인간 스스로 자신을 비인격화 즉 자신을 일정한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실천적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쉘러의 인간학, 그의 인격에 대한 윤리적 이해는 자율적 혹은 이성적 자기규정의 형식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의 선험적 이해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쉘러는 인간 정신작용의 범주를 사고하고 추리하는 것에 제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식이란 직관과 의욕, 사랑, 증오, 후회, 용서와 같은 정의적(情意的) 영역에 다른 발을 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쉘러는 인간의 인격을 의식의 통일체라는 전체 속에서 그리고 내적, 외적 세계와 만나는 중심체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쉘러에게 있어서 인격체가 사물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이유는 인간이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일정한 능력이나 정신적 힘을 소유한 실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그 외연을 더욱 확대합니다. 개인이 인격체인 이유는 그가 단지 실존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실존이라는 현상에서 쉘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칸트의 이성적 능력을 대체하는 것이 의식의 지향적 행위입니다. 인격체에게는 지향적 행위의 실현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 하나만으로 무조건성이라는 이름, 즉 추상적 자아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구체적인 전체성의 이름이 부여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리적 인격개념 속에서는 무엇보다 대상적 인식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전체에 대한 통찰이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아울러 이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적 삶에 대한 철학적 반성, 그리고 인격적 동일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존재론적 자기이해도 엿보입니다. 전체라는 측면에서 개인의 인격이란 본질상 대상으로 전락할 수 없으며, 그를 묘사하는 대상적 정의들은―지각, 표상, 생각, 기억, 기대 등―인격적 존재가 갖는 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이후에 기술(記述)되어 졌다는 것입니다. 인격이 드러내는 자기 동일성은 지향적 행위의 중심인 수적 동일성이며 자신에 대한 현상적 기술에 존재론적으로 앞서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쉘러가 어떻게 칸트의 형식적인 이성철학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지 그 과정을 숨 가쁘게 추적했습니다. 그것도 대단히 함축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말입니다. 요약해 보자면, 칸트의 윤리적 주체와 쉘러의 지향적 주체가 대결하고 있는 판국입니다. 그러나 말이 대결이지 엄밀한 의미에서는 인격에 대한 이해의 확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합니다. 칸트에서 쉘러에 이르는 철학의 흐름은 인격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가 그 깊이를 심화시키는 정신의 흐름이었던 것입니다.
철학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이 둘이 대체 무엇을 두고 고민하고 있는지를 인식론적으로 추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양자가 사용하는 전문용어를 일반적인 언어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 입니다. 도대체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주체에 대하여 인격체의 지향성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세계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전쟁
칸트와 쉘러의 대립구도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두 편의 문학작품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안네의 일기』와『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 그것입니다. 두 작품은 모두 2차 대전 당시 독일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둘 다 어린아이의 눈에 비쳐진 전쟁의 참혹함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등장하는 인물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안네의 일기』는 네덜란드가 독일에 점령당한 동안 나치의 눈을 피해 은신처에 숨어 살아야 했던 한 유태인 소녀의 성장기를 담은 일기입니다. 반면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독일군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유대인 수용소 근처에 살게 된 한 독일 소년에게 일어나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그리고 있습니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한 유대인 소년과의 우연한 만남과 우정이 저서의 주제인 듯하나, 심층에서는 독자로 하여금 현실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맥락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네의 일기』는 픽션이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탄압 정책으로 고통 받던 한 유대인 소녀가 자신의 삶을 기록해 놓은 실제 일기입니다. 이글의 주인공인 안네는 전쟁 말기 결국 독일군에 발각되어 수용소로 보내지게 되며 거기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일기를 넘겨받게 되면서 출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한참 사춘기를 겪던 열다섯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나치의 눈을 피해 한 건물의 조그만 은신처에 숨어 사는 소녀의 내면적 불안함이 일기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문학을 동경했던 소녀라는 사실을 증명이나 하듯, 그녀의 현실 묘사는 대단히 사실적입니다.
“키티, 바깥세상은 너무도 무서워. 불쌍한 유태인들이 밤낮 없이 끌려가고 있어. 그들은 끌려가면서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겨. 그리고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을 따로 떼어 놓아, 가족이 산산이 흩어지게 되고 말아.”
어린 안네는 사람들이 왜 전쟁을 하고 파괴를 일삼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지 그 답을 찾지 못합니다. 그녀는 나치의 불의에 의해 자행된 자신의 민족과 가족의 비극을 고발하는 것으로 일기를 채워나갑니다. 하지만 그녀의 일기는 단순한 고발성 기사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자아를 지닌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그녀의 삶에 대한 욕구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안네의 일기』를 단순한 고발성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문학의 반열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한편의 훌륭한 성장소설인 것입니다.『안네의 일기』는 한 사춘기 소녀가 바라보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 부모님과의 갈등, 이성 친구에 대한 고민, 가족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반성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반면『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안네의 일기』와는 다른 문학적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먼저 어떠한 내용이 들어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책은 부르노라는 이름을 가진 9살짜리 독일 소년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부르노는 아버지의 직업상 정든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는 새로운 집과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친구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리고 모험을 할 만한 마땅한 곳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그는 아버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근처에 신설된 유태인 수용소를 관리하는 사령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던 누나 그레텔이 나치의 교육에 적응해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갔던 반면, 부르노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애를 먹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그는 집근처 수용소에서 유태인 소년을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쉬뮈엘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아이는 우연이도 브루노와 나이와 생일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쉽게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브루노는 틈만 나면 유일한 친구였던 쉬뮈엘을 찾아갑니다. 비쩍 마르고 늘 배가 고파했던 쉬뮈엘을 위해 브루노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먹을거리를 가져다줍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친구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도 알게 됩니다. 그러던 중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사건이 터집니다. 아버지를 제외한 부르노의 가족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쉬뮈엘을 만나게 된 브루노는 행방불명된 친구의 아버지를 찾아주기 위해 쉬뮈엘이 챙겨온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브루노에게는 그것이 쉬뮈엘에게 줄 수 있었던 마지막 선물이었고, 동시에 그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대 모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 한번 해 보고 싶어. 아주 대단한 모험이 될 거야. 우리의 마지막 모험이지. 마침내 탐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신나는데!”
“그럼 내가 아빠를 찾는 일을 도와줄 수도 있겠네?”
“못할 것도 없지. 함께 주변을 돌아보면서 네 아빠의 흔적 일만한 게 있는지 찾아보는 거야. 탐험은 원래 그렇게 하는 거거든. 문제는 어떻게 줄무늬 파자마를 구하냐는 건데…….”
“아니, 그런 건 문제가 안 돼.”
“파자마를 보관하는 오두막이 따로 있어. 내가 가서 내 것과 비슷한 치수로 한 벌 골라 올게. 그럼 네가 그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함께 아빠를 찾으러 가는 거야.”
“와, 그거 정말 신나겠는걸!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야겠어!”
그들이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비가 내립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가축처럼 사람들을 몰아세우게 되었고 브루노와 쉬뮈엘도 얻어맞으며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곳이 그들이 세상에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이 되었습니다. 브루노와 쉬뮈엘은 그저 비를 피하는 줄 알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곳은 죽음을 부르는 가스실이었습니다. 쉬뮈엘의 아버지도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 듯합니다. 둘은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브루노가 사라지자 이제 그의 가족들이 그를 찾아 나섭니다. 군인들까지 동원되어 수색을 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철조망 주위를 돌던 아버지가 브루노가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발견하게 되며 이야기는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안네의 일기』와『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배경만 비슷할 뿐, 사뭇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작품의 구조를 비교하며 우리는 칸트의 윤리적이고 선험적인 주체에서 쉘러의 지향적 주체로 나아가는 정신적 여행이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봅시다.
『안네의 일기』는 유대인 탄압 정책으로 고통당하는 와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성숙해 가는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글을 읽으며 독일이 저지른 전쟁의 범죄와 유대인 학살이라는 반인륜적 잔인함에 분노합니다. 더불어 동일한 역사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역사의 정당성을 되묻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때 독자들에게 더불어 사는 인간적 가치의 추구는 일종의 당위(當爲)와 의무로서 부여됩니다. 칸트가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주체로서 선험적 주체를 전제한 것은 이러한 당위와 의무를 자신의 어깨에 지고 걸어갈 수 있는 인격체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도 지극히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요?
문제는 가치를 추구하며 실현할 수 있는 칸트의 선험적 주체가 잘못 설정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선험적 주체가 몸담고 있는 현실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 지입니다. 행여 칸트는 의무를 지고 가는 주체와 그 당위가 실현되는 현실을 존재론적으로 분리시킨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는 대목입니다.『안네의 일기』에서처럼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피해자와 타인의 꿈과 희망을 짓밟아도 여전히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가해자가 공존하는 현실 말입니다. 이 분리 속에서 존재하는 현실은 우리가 부여하는 가치나 이념과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맹목적이고 무관심한 대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실증적 분석을 목적으로 삼는 학문의 대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이해되는 현실 앞에서 다소 빈곤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돌멩이처럼 무덤덤한 세계에 살면서 우리의 체온을 조금 나눠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은 있는 그대로 주어진 현실과는 무관한 주관의 자기표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혹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과 함께 지각하는 가치들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동일한 지평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우리가 우리 자신과 그와 연결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은 열리는 존재입니다. 소위 인과 법칙이라는 객관적 질서에 의해 기계적으로 닫힌 공간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지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여하는 가치와 이념은 언제든 부정될 수 있는 단순한 주관적 표상이 아니라, 정확하게 현실과 동일한 지평에서 주어지고 자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열려진 현실에서는 객관과 주관이 고정된 실체로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주체의 고통 앞에 세계는 결코 무관심 하지도 냉소적이지도 않습니다. 그 역도 역시 성립할 것입니다. 자연의 고통에 무관심한 인간적 삶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이성을 폭력적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언제든지 양자의 관계를 바꿔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현상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단순히 자기의식의 획득과정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현실일 수 있습니다. 가치를 부여하는 의식은 주관이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 자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드러내준 작품이『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입니다. 언뜻 전쟁 속에서도 피어나는 아이들의 순수한 우정과 전쟁의 비극을 그린 듯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감춰져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주체가 추구하는 가치들과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계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극단적으로 분리시키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브루노와 쉬뮈엘이 만들어가는 현실은 피해자의 피가학적 분노와 가해자의 가학적 희열로 엮어진 그물망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엮어가는 현실에는 증오와 복수가 아니라 용서와 배려가 있습니다. 그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인식론적 폭력에 맞서 그들은 두 손을 마주 잡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죽음을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장 소중한 것을 살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 용기는 아이들의 현실을 바꾸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어른들의 현실도 역시 더 이상 분열을 겪지 않아도 된 것입니다. 자식의 죽음을 확인한 수용소 사령관은 더 이상 자신이 가해자일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가해자와 피해자는 원래 하나였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동일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피해자나 가해자는 서로 다른 두 현실에서 살아가는 별개의 존재자가 아니라, 동일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격체들이었던 것입니다. 한쪽의 부정은 곧 다른 쪽의 죽음을 의미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격체들이었던 것입니다.
쉘러에게 있어서 가치와 현실의 관계는 외적으로 분리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는 가치를 칸트처럼 단순히 선험적 주체가 짊어지는 의무에서 찾지 않습니다. 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치가 인간의 주관적 의지나 의욕인 것도 아닙니다. 쉘러는 인격체로서 인간의 지향적 정신작용이란 끊임없이 세계를 열어가는 인간적 능력임을 강조합니다. 지향적 정신작용의 방향이란 목적 없이 허공을 맴도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닙니다. 쉘러는 인간의 정신이 현실의 지평에 녹아들어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갈 때, 인간과 세계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쉘러의 고민은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화석화된 대상성으로부터 구원하여, 그것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칸트에서 조각난 현실은 쉘러에 의해 다시 하나의 주어진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성과 정의(情意), 형식과 물질, 가치와 세계는 현실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라, 하나의 현실을 묘사하는 구체적 내용들인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하이데거 또한 동일한 사유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하이데거의 이정표
하이데거가 쉘러의 인격개념으로부터 상당한 정도의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이데거는 쉘러의 철학적 상상력에 근본적으로 이의(異意)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쉘러에게 있어서 존재론의 주요 과제란 개별 실존이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어떻게 자신을 이해하고 넘어 설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른바 가치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과정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의식의 현상학은 곧 현실의 현상학인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쉘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만의 철학적 상상력을 전개합니다. 그는 쉘러가 인간의 인격에 대한 정의를 시도하면서 실존의 자기관계 속에 담겨진 소극적 의미에만 주목하였다고 지적합니다. 이른바 쉘러의 정신력이 인간실존에 대한 적극적인 존재론적 분석에 진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이데거를 쉘러와 구분시키는 결정적 지점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이데거는 일차적으로 쉘러에 의해 수행된 지향적 행위의 실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가치를 추구하며 실현하는 주체와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생각보다 포괄적입니다. 주체에게는 대상으로 닫힐 수 없는 가능성을 부여하며, 세계에게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모습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논점은 쉘러가 걸었던 길의 존재론적 불철저함을 지적하는 데 있습니다. 주관과 세계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확인만으로는 개별적인 실존이 어떻게 자신의 자연적 본성을 넘어 자신과 관계를 맺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SuZ, 48)
이러한 비판을 근거로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혼동함으로써 존재를 규명하는데 치명적인 결함을 보였던 전통적 존재론으로부터 쉘러도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합니다. 새로운 존재론의 과제란 전통적인 존재론의 부분적인 수정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만족시키며 존재를 적극적으로 해명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를 이름표처럼 따라 다니며 독자의 이해를 어지럽히는 현존재 분석은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조금은 어려운 설명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자연적 본성을 넘어 새로운 자신을 찾아 간다는 의미를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해명하려는 하이데거 철학의 출발지점에 와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될 점이 있습니다. 자연적 자신을 뛰어 넘어 또 다른 자신으로 나아가는 존재론적 과제는 어떤 형이상학적 목적이나 불변의 본질로 되돌아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열려진 존재란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혹은 생물학적 기원으로 열려짐이 아닙니다. 존재의 열려짐이란 오히려 개별 실존이 삶의 한가운데로 열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SuZ, 143)
‘삶의 한가운데’라는 표현은 하이데거의 용어가 아닙니다. 저자가 이해하는 하이데거 사상의 중심부분을 자의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용어로 굳이 환원시키자면, ‘실존의 자기관계’ 정도가 될 것입니다. 어느 개념을 사용하든 의미를 전달하는데 무리가 없다면, 무방해 보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 안에 공간을 열어 그것을 해석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동물은 삶의 한 가운데를 지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본능적인 삶 속에는 어떠한 정신적 공간도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관계가 부재한 것이지요. 반면 인간은 자신과 관계를 맺을 때야 비로소,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자신과 자신 사이에 놓인 공간을 직시할 때, 그는 삶의 한 가운데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되는 새로운 존재론은 주체와 객체의 분리로 형성된 인식론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더불어 인격이 자신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초월의 세계가 무엇인지도 보여줍니다. 과거 형이상학은 인간과 세계를 벗어나는 불변의 세계에서 초월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초월이 인간실존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존재의 사건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인간 실존은 사물의 속성이나 생물학적 중심을 넘어서 자신을 대상화시킬 수 있으며, 자신과 다시 관계를 맺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합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인간실존의 존재론적 가능성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실존을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하려는 하이데거의 새로운 존재론은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존재와 시간』은 존재에 대한 물음이 망각 속에 묻혀 버렸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묻혀버렸다. 비록 우리시대가 형이상학을 다시 긍정하는 자신을 진보로 간주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새롭게 불을 댕겨야 할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의 재개에서는 자신들이 면제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물음은 분명히 어떤 임의의 물음이 아니다. 그 물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숨 가쁘게 몰아대며 연구를 하도록 만들었지만, 물론 그때부터 실제 탐구의 주제가 되는 물음으로서는 침묵 속에 빠져버리지만 말이다.”(SuZ, 2)
문제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의 관계입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존재에 대한 탐구를 자신의 주된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한지도 모릅니다.『존재와 시간』이 전통적인 형이상학과의 결별을 주된 주제로 삼고 있음에도, 하이데거 스스로 자신의 사유를 완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선회’라고 일컬어지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관련된 사유변화는 그가 평생을 걸쳐 형이상학의 과제를 안고 씨름했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사유가 미완성으로 그쳤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결함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학문적 스캔들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의 철학이 지니고 있는 깊이를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지적하였듯, 자신을 아는 자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자일 것입니다. 철학적 깊이가 더해 갈수록 하이데거 또한 인식의 한계를 깨달았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쨌든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하이데거가 새로 구축하고자 했던 존재론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체계에서 유래합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 한 번도 형이상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철학분야를 제일철학이라고 이름 붙였고, 동식물 등을 연구하는 부문을 자연학이라 명명했습니다. 사후에 그의 유고(遺稿)를 정리·편집함에 있어 제일철학에 관한 것이 자연학 뒤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소위 자연학 뒤에 놓여 있다는 의미에서 형이상학(ta meta ta physika)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철학, 즉 형이상학에게 두 종류의 과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존재자들을 자신으로 있게 하는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존재, 이른바 ‘존재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것의 바탕과 근거가 되는 제일원리 내지는 제일원인을 탐구하는 것입니다.(Aristoteles, Met. A 1-2, 980a21-983a24 ; G 1-2, 1003a21-1005a18 ; E 1, 1025b3-1026a32)
하이데거 또한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과제를 이어 받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분석은 마지막까지 하이데거가 놓지 못했던 일생의 야망이었던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현대적 언어로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의 전술적인 결별을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의 역사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존재 자체를 대상적인 속성, 이른바 존재자의 특정한 속성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자기 부정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 비춰본다면, 하이데거가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비판했다는 지적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이데거의 목적은 존재 자체에 대해 물음을 제기했던 형이상학의 폐기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것의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이란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이라는 자신만의 성역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그 존재론적 조건을 묻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방법론적으로 현상학적 지평위에 서게 됩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어야 한다. 만일 그 물음이 하나의 기초적인 물음 또는 바로 그 기초적인 물음 그 자체라고 한다면, 그러한 물음은 그에 합당한 투명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간략하게나마 하나의 물음에 도대체 무엇이 속하는지가 논의되어야 한다. 그래야 거기에서부터 존재물음을 하나의 탁월한 물음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SuZ, 5)
존재에 대한 물음을 그에 합당한 투명성을 지닌 채 드러내 보이려는 하이데거의 의도는 결코 쉽게 이해될 수 없습니다. 사실『존재와 시간』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상상력은 현존하는 철학서 중에서 가장 난해한 것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덧붙여서 그의 미로와 같은 사유에 내재하는 모종의 비약도 우리의 평범한 진입을 어렵게 합니다. 하지만 그가 도달하려는 마지막 정거장을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가 그의 작품을 재구성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이데거의 길은 인격체의 자기이해에게 존재론적 열쇠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물음은 인격체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과 존재론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이해란 결국 현존재 자신의 본질이해에 속한다.”(SuZ, 8)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개별 실존이 자신과 맺는 관계를 통해 해명하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명제입니다. 이는 존재 자체를 인간적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의미로 파악하려는 그의 철학적 의도가 낳은 논리적 결과입니다. 존재에 대한 이해란 곧 ‘나’에 대한 이해라는 겁니다. 존재의 의미가 오직 나의 존재에 의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는 직관은 하이데거 철학이 지니는 철학사적 의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그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존재에서 실존으로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 자체의 해명이란 개별 실존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집니다. 이 과정이 명확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왜 존재에 대한 물음이 인간의 실존인 현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앞서 언급하였듯, 존재란 스스로 드러나야 하는데, 그 드러남의 한 가운데에 인간의 실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보편적인 유(類)로 존재하기에 앞서 실존하는 개별자입니다. 개별적 인격체로서 오직 인간만이 자신과 관계를 맺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만 현존하는 사물이나 본능으로 살아가며 자신과 일치하는 동물과는 달리 개별 실존으로서 인간은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반성함으로써, 존재론적 차이를 세상 안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와 관계를 맺는 인간의 모습을 하이데거는 사물의 범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실존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실존은 대상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난다는 점에서 존재적-존재론적 차이의 주체입니다. 이 주체가 초월을 상징하는 진리를 세상으로 불러오는 유일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이란 근본적으로 사물과 구별 짓기 위해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동일자에 대한 또 다른 이름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정한 경험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현대의 인격개념과 정확하게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실존에 대한 하이데거의 견해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독자는 실존, 주체, 차이, 초월, 진리와 같은 전통철학의 대형주제들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연결될 수 있는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존재와 시간』이 인간 실존에 대한 분석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존재론적 차이를 둘러싼 개념적 정의가 명쾌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에 반해 다른 저서에서는 좀 더 명확한 입장이 보입니다.『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Was ist Metaphysik?』라는 교수임용 강연에서 하이데거는 실존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이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실존한다. 바위는 존재하지만 실존하지는 않는다. 나무도 존재하지만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말도 존재하지만 그 또한 실존하지 않는다. 천사도 존재하지만 실존하지는 않는다. 신도 존재하지만,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실존한다는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인간은 존재의 드러남이라는 개방된 자신으로 있음을 통해, 존재로부터, 존재에서 그의 존재가 특별해지는 그런 존재자인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 본질이란 인간이 존재자를 그 자체로 생각하고 표상된 것에 대해 의식을 지닐 수 있기 위한 근거이다. 모든 의식은 인간의 본질로서 도취적으로 사유된 실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
일차적인 전제는 개별자로서만 실존하는 인간만이 자신의 가능성 속에서 자신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라는 겁니다. 하이데거는 이로부터 실존에게 초월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부여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의 형이상학은 초월을 인간적 한계의 너머에서 찾았지만, 하이데거는 오히려 역으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인간의 실존 내부에서 존재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생각은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현대 인격이론에 영향을 미칩니다. 실존으로서 인간 존재가 존재자의 속성에 수동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더 나아가서 인간의 실존이란 존재자의 근거이자 원리인 존재가 인간의 자기관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SuZ, 27) 실존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한 가운데는 의미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가까운 예를 통해 더 깊은 이해를 구해 봅시다.
매미목과에 속하는 매미는 처음에는 유충으로 6~7년간 땅속에 있으면서 나무의 수액을 먹고 자라다가 지상으로 올라와 성충이 되는 특이한 생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번데기라는 유충 과정이 없이 탈피과정을 거쳐 바로 어른벌레가 되는 불완전한 변태로 성충이 된 후에도 나무의 줄기에서 수액을 먹는다고 합니다. 약 3년간의 애벌레 기간을 보내고 나면 여름이 시작되고, 이때 나무위로 올라온 굼벵이는 성충으로 우화(羽化)를 합니다. 수컷의 경우 우화를 한 지 약 3∼5일 후부터 울기 시작하는데, 그 후 대략 한 달 정도를 살다가 알을 나무껍질 속에 낳고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백년 남짓 자아실현이라는 삶의 과제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눈으로 보면, 매미는 상당히 특이한 일생을 지닌 듯합니다. 알에서 부화한 후에 수년간을 천적들의 공격을 피하며 애벌레로 땅속에서 살다가 성충이 된 후에도 불과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니 말입니다. 어찌 보면 상당히 기구한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단 며칠의 화려함을 위해 숱한 세월을 고통 속에 준비했으니 말입니다. 생물학자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기까지 합니다.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그토록 비효율적 생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을 훨씬 풍요롭게 해석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상당히 기구해 보이는 매미의 운명에서 우리는 존재가 자신을 인내로 드러낸다는 사실을 지각할 줄 압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 과제를 며칠간의 지상 생활에서 수행하기 위해 수년간을 애태웠을 매미의 기다림을 우리가 높이 사는 것입니다. 숱한 천적들의 공격을 피하며 자신의 꿈을 위해 살아가는 매미의 모습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한줄기 희망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희망과 소망이란 고난을 이긴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역경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매미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자신을 의미체로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 눈이 바로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눈은 사태를 정반대의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매미의 삶을 어리석은 보존본능의 결과물로 폄하할 수도 있으니까요. 단 그러한 경우,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란 고작 매미의 일생에서 의미를 박탈하고, 생존 욕구라는 에테르로 가득한 지루한 연극으로 변신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은 생물학적인 생존만을 위해 자기 자신과 관계하지 않습니다. 알에서 애벌레로 그리고 다시 성충으로의 변해가는 매미의 일생은 우리의 실존적 자기이해 속에서 인내와 희망 그리고 삶의 실현이라는 의미의 변화로 탈바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의 물음을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시킨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통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매미의 삶은 여전히 매미의 삶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매미는 알에서 부화한 후에 땅속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매미에게 정해진 생물학적 질서입니다. 매미가 그것을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매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질서에 순응하며 자신의 처음과 끝을 장식합니다. 그것을 반성하고 인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격체로서 인간 존재에게만 부과된 존재론적 과제인 것이지요. 매미가 나무위로 올라가 며칠간의 생을 위해 그토록 울어 제친 이유는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본능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 실존에게 생물학적 번식이란 새로운 희망과 삶의 실현이라는 존재의 목적이 드러나는 유일한 지평이 되는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운 이유는 오로지 인격체로서 인간에 의해서만 표현되고 지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인간 실존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맥락이 하이데거가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지평을 현존재 즉 인간 실존의 드러남과 동일시하게 된 이유입니다. 실존을 삶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닫힐 수 없는 가능성으로 이해하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시도는 ‘나’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로부터 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닫혀 있음’과 ‘열려 있음’이라는 두 실존양식을 단순히 부정적 혹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원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존재론적 분석이란 분명 인간 실존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가능케 하는 기본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양자의 관계가 시간적 선후(先後)로 연결되어 있는지 혹은 존재론적 우선 순위로 차별화된 것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고찰방식을 동일시하려는 태도가 자칫 우리 자신을 편협하게 왜곡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발생은 윤리적으로 참이기 때문에 모든 분석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형이상학적 본질인 초월의 흔적을 나의 존재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그것이 옳다거나, 혹은 인식론적으로 타당한 방법론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현실을 조목조목 지각할 때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분석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나’의 존재 안에서 무엇이 발생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발생 자체이자 존재의 발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의 열려있음을 전통 철학과의 논쟁을 통해 설명하려고 합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하였던 ‘가능태’와 ‘현실태’에 대한 그의 논평이 그것입니다.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자의 생성과 변화과정을 가능태와 현실태로 구분하여 설명해왔던 전통적인 인식체계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잠시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하였던 구별을 검토해 봅시다.
질료(hyle)와 형상(eidos)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관통하는 중심개념들입니다. 질료란 생성의 기초가 되는 ‘무엇’으로서 가능태(dynamis)를 지칭하며, 형상이란 그 질료로부터 생성된 현실태(energia)를 의미합니다. (Aristoteles, Met. 1049b) 이 구별은 가공되지 않은 철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철은 다른 금속과 합금이 용이하여 일상생활에 사용량이 가장 많은 금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가능성에 불과 합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기능을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인간은 철을 가공합니다. 그것을 실현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건축물의 골재, 기계, 선박, 각종 가전용품, 자동차의 몸체와 엔진에 사용될 때 철은 엄청난 위력을 자랑합니다. 여기서 원료로서 사용되는 철은 질료라고 불립니다. 가공된 것은 이른바 형상이 되는 것이지요. 철은 가능태이며 철을 이용해 만들어진 각종 기계들은 철이 실현된 현실태가 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우리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비판은 존재자의 생성과 변화 과정을 가능태와 현실태로 구분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예봉(銳鋒)은 현실태가 가능태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항상 우위를 점해왔던 지성사의 편견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세계도 동일한 편견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다시 가까운 예를 통해 설명해 봅시다.
개인의 본성에 대한 성찰은 오랜 철학적 주제 중에 하나였습니다. 인간의 성정(性情)은 타고난 것일까요? 아니면 환경에 의해 변할 수 있을까요? 우리 시대의 언어로 다시 표현해 봅시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우리를 만든 것은 유전자일까요? 아니면 문화일까요? 다소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가장 상식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은 아마도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론일 겁니다. 오랜 진화과정에서 드러난 인간 본성들의 차이와 다양성, 복잡한 사고와 상징능력, 욕망과 윤리의 변증법을 단순히 유전자나 환경으로 환원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말고 우리의 주제였던 가능태와 현실태의 구별에 이 문제를 적용해 봅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능태를 유전적·생물학적 기반을 의미하는 타고난 기질이나 본성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복잡한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허무적인 무목적성에 항복하지 않고 삶에 풍요로운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주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실현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저 정처 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실현돼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정해진 방향을 지향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타고난 본성이 자연이나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실현될 때, 우리는 자아실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본성과 환경, 유전자와 문화를 기계적으로 결합하거나 혹은 그 중 하나를 떼어내어 다른 것들을 수렴하는 원천으로 삼을 때 발생합니다. 인격을 추상화시키는 것입니다. 심리학과 교육이론에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던 구조주의, 행동주의 심리이론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구조주의는 내재되어 있는 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한 개인의 행위의미를 해석하는 이론입니다. 이성적 판단이 빙산의 일각이라면, 수면아래 가라앉아 있는 거대한 덩어리가 무의식이라는 겁니다. 누군가가 일탈행위를 보일 때, 그 원인을 찾기 위해 그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트라우마와 같은 경험복합체를 찾아내는 식입니다. 그 반대가 행동주의 심리이론입니다. 행동주의는 겉으로 드러난 개개의 행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의 변화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생물학적 이론 모델입니다.
기질이나 본성은 바꿀 수 없는 타고난 것이며, 그것이 현실태로 실현될 수 있도록 통제하는 것이 환경이라는 생각이 주된 사고로 굳어지게 되면, 논의의 중심은 현실태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환경으로 이동합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Burrhus Frederic Skinner, 1904∼1990)의 조작적 조건형성 이론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의 주된 논점은 인간의 행위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에 있습니다.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마음의 자율성, 환경을 벗어나 무조건적 행위를 결정할 수 있는 선험적 주체 등은 그에게는 정신적 허구일 뿐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유발하는 근본적 동기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으며, 상∙벌과 같은 강화요인들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행위에 따르는 결과물이 곧 그 행위를 결정한다는 인식이론입니다.
인간적 삶의 방식을 단순히 자극과 반응이라는 기계적 원리에 입각하여 마음의 능동적 원리를 무시하는 이러한 심리이론은 현실태에 대한 존재론적 강조가 빚어낸 비극입니다. 가능태가 변형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면, 바람직한 현실태의 생성을 위해 그 발생조건에 개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적 욕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데거는 현실태에 대한 인위적인 강조와 방점이 인간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 해명을 상당부분 왜곡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앞서 인격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두 종류의 질문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며, 둘째는 “인간이란 누구인가?”입니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아마도 무엇이 논점이 되고 있는지 이미 인지하였을 것입니다. 개별적 실존의 ‘무엇’을 묻는 것은 그의 현실태에 대한 질문입니다. 반면 개별 실존의 ‘누구’란 그의 가능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가능태보다 현실태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것일까요? 질료와 형상으로 가능태와 현실태를 구분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상상력이 인류 지성사에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지대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의 ‘누구’를 망각하고 ‘무엇’에 천착하는 태도가 가능태와 현실태의 존재론적 관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합니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 봅시다.
본래성과 비본래성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로서 개별 실존의 구조는 현존하는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로부터 유래하는 다양한 대상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인간의 실존양식, 즉 현존재란 가능태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가능태란 일반적으로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음’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태의 한 면만을 추상한 것입니다. 가능태의 존재론적 기초는 차이입니다. 나의 존재가 자신 안에서 빚어내는 존재의 분열인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이 차이를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개별적 실존이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세상으로의 던져짐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 시간에 대해 깨어있을 때 그는 본래적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반면 타인과의 일상적인 ‘함께 있음’에 매몰되어 그저 익명으로 살아가는 개인의 모습을 하이데거는 실존의 비본래성이라고 칭합니다. (SuZ, 127)
하이데거에 의해 행해진 자아의 분열을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이러한 존재론적 차이가 철학사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 봅니다. 일찍이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세계와 우리의 주관에 의해 왜곡된 현상의 세계를 통해 이 차이를 보았습니다. 칸트의 철학적 상상력에 따르면, 우리는 인과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인식의 세계에 한쪽 발을, 실천에 의해 열려지는 자유와 목적의 세계에 다른 쪽 발을 담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헤겔은 인간의 정신현상을 즉자성과 대자성으로 구분하여, 인간의 근본적인 자유를 가능케 하는 절대정신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절대정신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지나간 뒤, 그를 비판하며 등장하였던 쇼펜하우어나 니체 또한 표상의 세계에 맞서 의지와 권력의 세계만을 현실의 세계로 인정하려고 하였지요. 철학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정신의 왕자들에 의해 제기된 이러한 ‘차이’가 하이데거의 사유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일까요? 하이데거만의 문제의식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의 발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으로 던져진 존재이다.”
다소 난해하여 그 출발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하이데거의『존재와 시간은 사실 이러한 존재의 원초적 사태에서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개별 실존의 담당자인 주체로서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은 우리의 존재가 일정한 상황으로 ‘던져졌다’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실증과학은 인간존재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과학적 분석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발견된 기원들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대단히 미약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일정한 삶의 문맥 안에서 생각하며 다양한 인식과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존은 세계안의 존재자로서 존재의 우연한 사건임에는 분명하지만, 이러한 우연적 일상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무수히 많은 예들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과 만나며, 그가 우리 자신을 스쳐가고 있다고 지각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반성하며, 우리가 그것의 일부분임을 인식하기도 합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준 가공의 원료이지만, 자연 안에 안겨 있을 때 우리는 때때로 어머니의 품에 있는 것처럼 포근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수단을 향유하며 그로부터 모든 존재자에게 외적 목적을 부여하지만, 우리 자신 스스로는 자신으로 존재하는 자기목적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이해되고 해석되어진 세계에 살아가며, 그 가운데 모든 존재자의 본질이 무엇인지 실증적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때때로 존재의 대상성을 넘어서기 위해 그것의 근거를 기초 짓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개별적인 실존으로서 항상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을 이해하며, 이러한 이해를 다시 자신의 존재 안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세계로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정한 사회적 문맥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자신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개인은 자신의 존재에 가장 가깝게 밀착되어 자신을 규정하는 이러한 존재적 친밀함을 통해 일차적으로 자신에 대한 표상을 얻으며 아울러 존재 자체 또한 이러한 친밀함을 통해 구성해 냅니다. 하이데거에게 한 시대를 여는 개념적 열쇠를 쥐어주었던 ‘현존재’는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린, 고립되고 뿌리가 뽑힌 주체로서는 결코 지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존재는 이미 세계와 타자와의 공존을 통해 형성되어진 선 이해를 통해서만 매개되는 것입니다.(SuZ, 123)
현존재란 이미 일정한 존재적 관계를 통해서만 지각되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일상적인 세계와의 경험은 이론적으로 고찰되어진 자기에 대한 인식적 이해 보다 분명 존재적으로 앞서갑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보이는 존재와 존재자의 혼동, 이른바 존재의 모습을 개별 존재자가 지니고 있는 대상적 속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분명 불철저한 철학적 반성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를 물리적, 심리적 속성으로 환원하는 오류는 사실 우리의 삶에 밀착되어 우리의 의식을 조건 짓는 이러한 존재의 친밀함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을 다양한 사회적 속성들 예컨대 학력, 가족, 명예, 부, 권력, 지위등과 동일시하거나 혹은 개인적 노력이 만들어낸 사회적 결과물로 이해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물화된 인간의 자기의식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이데거에 의해 현존재의 비본래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러한 존재적 가까움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존재의 방식입니다. 그러한 존재 방식이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서 삶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존재의 친밀함은 존재의 선물이기도 한 것이지요. 조금은 난해한 듯 보이지만, 하이데거의 표현 방식을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거리감, 평균성, 평준화 등이 그들의 존재방식들로서 우리가 공공성으로 알고 있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다. 이 공공성은 우선 모든 세계 해석과 현존재 해석을 규제하며 모든 것에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사물들에 대한 어떤 탁월하고 일차적인 존재관계에 근거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공공성이 어떤 두드러지게 자기 것으로 만든 현존재의 투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가 아니고, 오히려 사태에 관여하지 않는 근거로 그런 것이며, 공공성이 수준과 진실성의 그 모든 차이에 대하여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공공성은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들어버리며 그렇게 가려진 것을 잘 알려진 것으로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내준다.”(SuZ, 177)
원래부터 ‘타자와 함께 세상에 던져져 있음’이라는 개별 실존의 공공성이 존재적 친밀함입니다. 개별 실존들의 세상에 대한 지각은 고유한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결코 겹쳐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적 친밀함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의 실존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지 않고도, 일정 부분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근본적이지 않기에 곧 타인의 실존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이라는 존재의 사건이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세계에 의해 주어진 다양한 질적인 속성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장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불현듯 우리의 실존은 자기 자신만의 본래성으로 깨어나게 됩니다. 존재의 선물은 단순한 생활의 편안함을 넘어 개별실존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일종의 과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하게 주어진 사회적 조건으로 정의된 자신의 정체성에 우리가 심대한 존재의 빈곤함을 경험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사회적 조건으로 포장된 자신을 벗어나 또 다른 ‘나’로 깨어나는 과정이란 단순한 윤리적 요청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가 우리에게 지각되는 직접적인 사태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봅시다.
자신으로 깨어난다는 것
나는 사회적으로 많은 옷들을 걸쳐 입고 자신을 드러냅니다. 누구의 부모라는 혈연의 옷, 어느 도시의 거주민이라는 시민의 옷,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직업의 옷,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국적의 옷 등등 말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묘사하기 위해 이렇게 덕지덕지 기워 입은 옷들만 해도 수십 벌입니다. 이 옷들은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합니다. 나에게 잘 어울린다는 평가와 함께 자주 애용되는 옷들이 있는가 하면, 거의 입지 않아 항시 옷장의 한자리만을 차지하고 있는 옷들도 있습니다. 시대적 흐름과 어울리는 옷이 있지만, 이미 한물 간 옷들도 있습니다. 한 때 잘 어울렸지만 지금은 살이 쪄서 잘 맞지 않는 옷도 있습니다. 많은 돈을 주고 직접 구입한 값비싼 옷도 있고, 선물로 받은 옷도 있습니다. 아마도 옷장을 열어 모든 옷들의 내력을 이야기하려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오래 산 사람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걸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옷들이 어쩌면 나의 모습보다도 더 먼저 나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졌을 때조차도 내가 서 있던 그 자리에 나의 옷가지들은 남겨져 있을 것입니다. 불교적인 의미에서 누군가의 옷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그가 걸쳤던 옷을 태워 이승에 대한 집착을 끊어 내려는 의례는 옷이라는 단어가 단지 몸을 덮기 위한 도구 이상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사회적 옷의 의미가 가장 부각되는 시점은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에 실려 있는 한 자락의 부고(訃告)는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줍니다. 그 옷가지들이 타인에게 나의 존재를 기억시키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존재의 균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물질적 덩어리로 걸어 다니는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을 때 비로소 나에게 존재론적으로 남겨지고 또한 기억되는 나라는 육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가치 구조화된 사회 내에서 인격의 정체성은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갖는 대상적 속성이 상실됨과 함께 추락할 수 있습니다. 이때 삶의 의미도 함께 묻혀 버릴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실존의 내부에서 우리가 존재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나를 가려주던 다양한 사회적 방패가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만으로 홀로 남는 순간, 우리는 실존이 단순한 존재적 선물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관계의 매듭을 지어야만 하는 일종의 과제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도 내가 실존으로 깨어나는 순간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정의 주체가 일반인이 아니라 바로 나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홀로 남겨질 때, 우리는 세상 안으로 불안이라는 존재의 현상을 불러옵니다. 불안은 돌멩이와는 달리 스스로 자신과 관계를 맺는 인간 실존을 설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내가 내 자신과 관계를 맺으려면 스스로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불안은 바로 그 돌아봄을 가능케 하는 존재자체의 힘인 것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힘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유의 힘이나 반성의 능력과는 다소 구별됩니다. 불안을 단순히 일반적인 이성이나 의지의 힘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그 힘의 소유 여부를 둘러싸고 또 다시 편 가르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불안이란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닌 세상에 던져짐과 함께 인간 실존에게 주어지는 존재의 현상입니다. 나의 지각, 바람, 느낌, 기억 등이 그것을 제거하거나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존에게 주어진 유일한 권리는 불안이라는 존재의 현상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을 맺는 것입니다.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는 아마도 개별 실존이 지니고 있는 지각의 크기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실존의 불안에 직면하여 좌절할 수 있습니다. 타인과 함께 던져짐이 선사해준 익명의 세계에 안주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 변할 수 있습니다. (SuZ, 128) 그것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우리로 하여금 지각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여분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구토를 일으키게 합니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표현처럼, 우리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의 존재일 수 있는 겁니다.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 대지의 양분으로 부활하는 썩은 육체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우리의 뼈도 여분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의 실존은 우리가 영원히 여분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존재의 불안 앞에 그저 소극적으로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습니다. 존재를 삶의 과제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전자와의 적극적인 관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는 윤리적인 요청이 아니라 실존의 또 다른 존재양식입니다. 여분의 존재에 구토를 느꼈던 사르트르도 인간적 자유의 근거를 바로 그 여분의 존재위에 세웠던 것입니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실존주의의 선언은 형이상학의 해체가 아닙니다. 실존의 목소리란 형이상학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의 목소리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자유로운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은 실존이 자신의 존재와 맺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계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로 변해 버린 자신에 대한 지각이 개별자에게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깨어나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아직 실존이 자신과 맺는 적극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를 판단하고 선택함으로써 자신에게 책임을 부여하게 됐을 때, 비로소 실존은 자지자신과 적극적인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연히 세상으로 던져진 실존이 자신과 맺는 적극적인 관계는 우연과 여분이라는 실존의 색채를 바꾸기에 충분합니다. 선택과 책임 그리고 그로부터 귀결되는 의무가 존재를 필연의 세계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책임이라는 개념은 개인의 어떤 행위가 그 행위의 주체로 다시 돌아가는 형식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항상 책임과 결부되어 논해지는 이유는 양자의 형식적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서 시작하여 자신으로 돌아가는 자기관계의 구조를 띠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책임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삶에서 갖는 실천적인 역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과 관련을 맺는 것은 언젠가는 많은 불이익을 초래할 것입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어떠한 형태로든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윤리적 책임이 강제성을 띠지 않는 반면, 법률적 책임은 행위의 결과를 보상해야만 하는 법적 의무를 지게 됩니다.
우리는 책임을 지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회적 삶을 유지하는 가치로 굳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기꺼이 책임을 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책임이란 의무나 임무 혹은 일종의 짐과 동일한 의미로 지각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의무나 임무 등을 수행하는데 아무런 보상도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도 기꺼이 그 짐을 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일반적인 의미에서 책임이란 대가라는 일정한 조건이 결부된 책임입니다.
책임이 갖는 존재론적 성격은 일반적인 책임의식과는 다소 구별돼야 됩니다. 물론 양자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책임의 존재론적 이해란 일반적인 이해가 가능할 수 있도록 그 조건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존재론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책임이 지니는 어떠한 실천적 의미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분석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와 선택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하는 책임은 우연히 던져진 나의 존재를 필연의 존재로 전환시킵니다. 이러한 운명적인 필연은 하이데거 철학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존재의 자기화(Selbstsein)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존재의 자기화란 이미 대상화 돼 버린 자기 자신과 나의 존재가 직접 관계를 맺음으로 발생하는 존재의 영역으로서 선택과 책임 그리고 의무를 세상 안으로 불러옵니다. 실존으로 깨어난다는 것은 곧 책임과 의무를 수행한다는 의미와 동일한 것입니다.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책임이란 우리가 임의로 짊어질 수도 있고 혹은 내려놓을 수도 있는 단순한 짐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실존으로의 깨어남 자체가 곧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책임을 지는 동안만큼 나는 실존합니다. 책임이란 단순히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나에 의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지각되는 것입니다. 실존이란 곧 책임이 됩니다.
‘책임지다’라는 동사는 라틴어 ‘respondēre’에서 유래합니다. 영어로는 ‘responsibility’, 독일어는 ‘Verantwortung'을 책임이라는 단어로 사용합니다. 특이한 점은 한결같이 ‘대답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무엇에 대답한다는 뜻일까요? 우리의 주제와 연결시켜 보면 그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책임이란 일차적으로 나의 실존에 대한 대답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이 질문은 우리에게 주어진 윤리적 과제가 아닙니다. 나의 실존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질문이며, 그 질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바로 책임의 구조가 되는 것이지요. 일차적 단계를 벗어나면, 책임은 타인과 세계로 그 외연을 확대합니다.
존재론적 의미에서 책임은 경험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의 풍요로움을 세상 안으로 불러 옵니다. 우리는 앞서 책임이란 개인의 어떤 행위가 그 행위의 주체로 돌아가는 형식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세계에서 책임은 더 많은 내용을 필요로 합니다. 누군가를 그의 행위로 인해 비난이나 비판하기 위해서는 혹은 그에게 법적 책임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맥락이 성립해야 합니다. 그의 행위가 자발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상황에 의해 강요된 비자발적 행위였는지 말입니다. 행위의 주체가 윤리적 기준을 판단하는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시키고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전쟁을 자신의 가치관에서 배제하는 사람에게 국방의 의무를 지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로 행위의 결과가 일반적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필요합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책임으로 부여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너무 가혹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 상상력이란 대상적 정의를 통해 망각되어진 존재의 풍요로움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철학적 상상력이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대상화된 자신을 반성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게 의미의 풍요로움을 찾아주는 실존의 결단입니다. 아울러 표상으로 정의되어질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로의 진입인 것입니다. 철학의 힘이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는 현실태를 뛰어넘어 존재론적 가능성으로 열려질 수 있도록 존재의 길을 준비하는 정신적 힘, 즉 가능태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현실태인 대상적 성격을 근거 짓기 위해서도 실존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존재론적 차이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다양한 기질과 선호를 가지고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기획하는 자연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미래로 나아가는 기획이 개별 실존을 대상성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가능태의 원천이라고 주장합니다. (SuZ, 145)
현상하는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현존하는 현실태입니다. 인간 또한 개별자로서 일정한 방식으로 현존합니다. 일정한 현실태가 그의 ‘무엇’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의 ‘무엇’이 실존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본래성 속에서 실존으로 깨어나는 종류와 방식은 사물의 방식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존재의 이해가 세상 안으로 들어오는 가능성의 형태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존에 대한 질문은 ‘무엇’을 묻는 대상성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대상성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자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 가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와 함께 인간의 존재를 다양한 경험적 속성으로 정의하려고 했던 경험주의적 인격개념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됩니다. 개별적 실존이란 현존하는 사물들처럼 주어진 세계에 수동적으로 그리고 수단적으로 배열될 수 있는 개체가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물들이 용기에 담겨져 있듯, 그렇게 세상 안에서 단순히 ‘있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SuZ, 54) 인간이란 자신을 이해하며 자신과 관계를 맺음으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유일한 존재자인 것입니다. 인간 실존의 본질은 현존하는 속성을 통해서 인식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각각 자신에게 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열려져 있음 자체입니다. 그것의 의미는 상호인정입니다. 인간 실존이란 오로지 상호인정을 통해서만 지각되어지는 존재의 발생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 하이데거의 언어는 난해한 변신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를 근거로 하이데거는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같은 다양한 자연과학이 어떻게 인간을 추상화시키고 있는지를 지적합니다. 실증학문의 인간이해는 개별적 실존에 내재하는 존재론적 차이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SuZ, 49) 그 망각의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치명적입니다. 하이데거는 생물학적 인간관으로 통합될 수 없는 개인적 삶의 의미를 상기시킵니다. 인격체로서 개인의 삶이란 존재의 자기화가 발생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반성의 주체로서 인식으로부터 벗어난 고유한 ‘누구’를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로서의 인격적 정체성은 심리적, 혹은 물리적 현상과 동일시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초월적 의미를 갖습니다. 인격이란 어떤 대상이 아닌 단 한번뿐인 인생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누군가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자리는 모든 사회적 문맥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하나의 문맥이 된다는 사실을 지각할 때 우리는 초월을 세상 안으로 불러오게 합니다.
다음 장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어떻게 자신의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 인격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는지를 다룰 것입니다. 신기한 점은 형이상학의 반대편에 서 있는 실증학문도 동일한 대열에 합류한다는 사실입니다. 양자를 묶고 있는 공통분모는 인격의 열려짐을 대상적 속성으로 환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원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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