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의 위기
자기 정체성, ‘나’라는 존재의 발견은 철학적 상상력과 서양 철학사에 한 획을 긋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 저서도 역시 인격에 대한 정당한 논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누차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철학사 전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은 분명 인정해야 합니다. 저자가 보는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현대철학이 누구로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통해 고유함과 대체할 수 없음이라는 존재의 세계를 세상 안으로 들여왔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로서의 ‘나’는 분명 존재가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가 된 것입니다.
나와 존재,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동일자에 대한 통찰은 형이상학의 주된 주제였습니다. 보편적인 존재와 존재자 그리고 세계의 궁극적인 근거를 연구하는 형이상학은 왜 내가 나와 동일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학문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현대철학은 전통적 형이상학과 근본적으로 결별하였습니다. 과학과 실증학문의 약진이 현대로 하여금 형이상학의 난해한 언어로부터 벗어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실증주의적 학문이 추구하는 현실적 목표점이 형이상학의 반대편에서 자신의 기틀을 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어쩌면 실증학문은 기존의 형이상학이 몰락한 자리에 또 다른 형이상학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관찰과 경험, 그리고 검증의 세계가 최종적으로 형이상학을 붕괴시킨 것은 결코 아닙니다. 형이상학을 학문체계의 최고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장본인은 바로 형이상학 자신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의 불일치가 근본적인 갈등을 야기한 것입니다. 이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인격적 정체성을 어떻게 세워갈 수 있는지 그리고 정당화해야 되는지와 관련하여 그 출발점을 제시해 줍니다. 분명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인격적 정체성의 본질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적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철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붕괴된 자리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렇다고 수치화되고 계량화된 실증학문의 도전에 백기를 들고 투항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는 양 극단 사이에서 중도의 균형을 지켜가는 것일까요? 현대철학을 정과 반이 교차하는 변증법의 산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왜 현대철학은 전통과 실리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일까요? 결론을 앞당겨 보자면, 형이상학과 실증학문이 공통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현실의 이편과 저편에서 서로 상이한 길을 개척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목표를 향해 동일한 길을 걸어 왔다는 점에 있는 듯합니다. 기원에 대한 추구가 그것입니다.
현대철학은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형이상학과 실증학문의 사이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현대철학은 근대 이후 자연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약진하였던 실증과학의 편협한 객관주의적 인간이해에 대한 비판을 한 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축은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과 진보를 통한 행복을 약속하며 화려하게 비상하였던 인간의 학문, 즉 계몽의 정신에 대한 비판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는 신이 아닌 인간만의 이성 중심적 철학을 부활시킵니다. 신을 중심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신화적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이것이 바로 계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행은 생각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습니다. 가장 인간적 사회를 추구하였던 인간의 정신이 인간에게 가장 비인간적 재앙을 결과물로 떠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근거를 부정하는 역사였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는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돌아본다면, 이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한 단면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산업화는 급격한 인간소외를 낳았으며,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이성이 추구했던 진보의 정신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발걸음이었는지를 의심케 한 것입니다. 더욱이 구소련이 실현시켰던 권위적 사회주의,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대변했던 독재적 전체주의인 파시즘으로의 급격한 서구사회의 변혁은 현대로 하여금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게 됩니다.
현상학, 실존주의, 비판이론,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대표되는 전통 철학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현대철학을 특징짓는 인간정신의 흐름들입니다. 급변하는 사회에 대한 지성의 저항과 반격이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이들로부터 인식론적 공통점을 찾으려는 시도는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론들의 대표주자들이 지각하고 해석하는 인격적 현실이 서로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인격적 경험과 뿌리가 망각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망각은 형이상학과 실증주의가 공통으로 비켜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망각이자 존재의 상실인 것입니다.
현실의 망각
현상학은 의미의 망각에 대해서 말합니다.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에 의해 그 정체가 드러난 현상학은 우리의 시대를 문명의 위기로 진단합니다. 후설은 이성의 망각을 주된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소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의 망각이라니요? 그 반대의 경우라면 오히려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오늘날처럼 그 어떤 경우에도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성의 망각을 말하는 것은 부잣집 아이의 반찬투정 정도로 들리니 말입니다.
그런데 후설이 분석하는 사회적 맥락을 이해한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 형이상학을 붕괴시키며 화려하게 등장한 실증학문의 발달은 우리시대의 축복이자 저주입니다. 축복인 이유는 당연히 실증학문이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며, 반면 그것이 저주인 이유는 그 대가로 인간의 자발성이 폭력적으로 외면 받게 된 것입니다. 이성은 전적으로 도구적 이성으로 변한 것입니다.
도구적 이성이 인간에게 저주가 된 이유는 그것이 폭력적 이성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대상에게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가 맺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왜곡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도구적 이성의 횡포란 주체인 인간의 의식과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분리시킨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란 우리의 존재가 세상으로 던져진 사태 자체입니다. 그 던져짐은 의식과의 직접적 겹쳐짐 속에서만 지각될 수 있습니다. 의미를 통해서 말입니다. 도구적 이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단면적으로 잘라내고 추상화함으로써 인간의 의식과 주체마저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것이 후설이 말하는 현대문명의 위기이자 이성의 위기가 된 것입니다. 이성의 횡포에 맞서 이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후설의 요청은 사태 그 자체로 돌아와야만 한다는 그의 철학적 요청으로 메아리칩니다. 인간적 현실의 회복이자 의미의 세계를 되찾으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이 부분으로 다시 돌아갈 것입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적 삶의 단면이 왜곡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실존이 망각되었다는 것이지요. 사르트르가 본질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폐허가 돼 버린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그의 깊은 연민 속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인격이 소외된 세계에서 고독과 불안을 거치며 우리가 자신의 실존으로 깨어남은 윤리적 요청이 아니라 존재의 드러남입니다.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실존적 책임을 선언할 때,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휴머니즘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적인 철학적 담론이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동일자에 머물렀다고 비판합니다. 절대불멸의 형이상학적 진리, 이성에 의해 억압된 감성, 근대의 진보를 담당해온 이성 및 자율적 주체, 사회나 역사를 관통하는 단일한 의미 등은 모두 존재자의 동일성에 의거하여 타자를 억압하는 폭력적 기제였다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타자를 근거로 한 차이임을 강조하며 동일자를 해체하려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간략하지만 현대철학의 맥을 간추려 보았습니다. 각각 상이한 의식의 프레임들 속에서 전개되는 듯 보이지만 20세기 이후 철학사의 공통된 지평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망각된 현실을 다시 기억해 내려는 존재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형이상학과 실증적 학문에 의해 망각된 현실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망각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그 무엇이 잊혔다는 뜻인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고 그 대가로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조목조목 따져 보겠습니다. 먼저 실증학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안다는 것을 힘에 비유했던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감각 경험과 실증적 검증에 기반을 두고 자연에 관한 지식을 얻는 것을 인식론의 기초로 보았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자신의 주저『신 오르가논 Novum Organum』에서 인간이 지식을 추구할 때 범하는 오류의 심리적 원인을 추적하면서, 베이컨은 우상(偶像)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그것입니다. 그의 우상론이 말하는 인식론의 목적은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각종 형이상학적 신화와 선입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자연과 자신의 주인이 될 때, 참된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실증주의는 이후 자연과학적 방법이 철학과 사회과학 등 모든 정신과학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는 범과학주의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우리는 실증주의를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인류 지성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얻고, 그 대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희생시켰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먼 것을 알아냈지만, 가장 가까운 것을 인식의 영역에서 추방해 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자면, 우리는 존재자를 얻고 존재를 폐기해 버린 것입니다. 조금 어렵게 표현해 보자면, 존재적 자아를 위해 존재론적 자아를 포기한 것입니다. 인격적 정체성과 관련해서도 역시 동일한 논리가 적용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대상화시키기 위해 그 대상화를 감행하는 주체를 애써 외면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자세히 알아봅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감각 경험과 실증적 검증에 기반을 둔 것만이 확실한 지식이라고 보는 인식론적 관점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객관성이 중요시 되는 시대를 반영한 것입니다. 실증학문이 추구하는 객관성이 무엇을 위한 시도인지를 차치한다면, 실증적 연구는 현실적 토대를 상실한 기존의 형이상학적 상상력을 무리 없이 대체하고 있습니다. 객관성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려는 것일까요? 그 인식의 틀이 이른바 인과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현상이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였는지 그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른바 그 기원을 추적하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기원을 추적하는 방법론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설명하기 위해, 실증학문은 기원을 심리적 혹은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시킵니다. 단적인 예가 생물학적 환원주의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미 베이컨은 상이한 종들의 현재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척도로 잡종과 변이를 지목한 바 있습니다. 현대는 그 보다 훨씬 심층으로 내려갑니다.『이기적 유전자 selfish-gene』라는 저서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도킨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내재된 인격적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유전자를 선택합니다.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현상을 유전자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유전자가 자기 복제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전자 기계이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나를 설명하기 위해 나를 유전자로 환원시킨 것입니다. 물론 도킨스 또한 나의 존재가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물망과도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문화적 전달체인 밈(mem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밈이란 유전자가 유전자 풀에서 이동할 때 몸과 몸을 이동하는 것처럼, 문화와 문화 사이에서 전달되는 각종 정신적 정보의 복제자를 지칭합니다. 도킨스에 따르면, 인간은 유전자가 복제되어 진화하다가 자연선택의 원리에 의해 인격체라는 관념적 존재로 진화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적자생존의 원리에 입각하여 밈의 기계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것의 기원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목적이나 의식이 결여된 맹목적인 이기적 유전자만이 놓여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끝을 알 수 없는 고유한 이야기로 묘사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된다는 전통적 당위는 도킨스에게 있어서 단지 종교적 믿음에 불과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목적의 세계로서의 인격적 존재는 살아남은 개체의 자기관념이자 밈의 자기 복제일 뿐입니다. 나의 존재가 어떠한 실증적 기원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다른 예를 보겠습니다.
기존의 형이상학적 연구가 인격의 내면적 본질을 이해하는데 모든 사고력을 집중하였다면, 이제 실증적 연구는 뇌에 대한 과학적 연구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뇌는 인간의 모든 행동과 의식, 무의식을 통제하는 중추기관입니다. 학문의 실효성을 강조하는 실증학문의 레이더가 이것을 놓칠 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뇌를 분석하고 그 기능과 메커니즘을 활용할 수 있다면, 인간의 많은 행동양식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과법칙에 익숙한 실증적 사고는 이것을 정확하게 활용할 줄 압니다. 인간이 화를 내거나 긴장하면 뇌에서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공포감을 느끼게 되면 아드레날린(adrenalin)이 분비되기도 하구요. 이 물질들은 상당한 독성을 지니고 있어서 신체에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호르몬은 부정적으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도파민(dopamine), 세로토닌(serotonin), 엔돌핀(endorphin) 등 이른바 행복 호르몬 등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이전보다 밝고 행복하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지요.
도킨스가 나의 존재를 유전자로 환원시켰다면, 이제 나의 존재는 호르몬으로 환원됩니다. 일정한 호르몬이 개별적 실존의 고유한 지각들의 기원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기원에 집착함으로써 벌어진 존재의 왜곡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뇌에서 분비되는 다양한 호르몬들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지각들과 분명 인과의 법칙으로 연관될 수 있습니다. 실증과학의 관찰과 검증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요. 내가 슬퍼하거나 화를 낼 때 일정한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사실은 거짓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낄 때 전혀 다른 역할을 하는 호르몬이 내 눈을 멀게 한다는 사실도 관찰될 수 있습니다. 콩깍지가 씌웠다는 속담은 단순한 구전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호르몬도 개별 실존이 세상과 관련을 맺으며 드러내는 행복과 불행의 최종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개별 실존이 자신으로 깨어날 때 동반하는 홀로 있음과 불안은 호르몬의 분비에 의해 야기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병에 빠지게 만드는 주피터의 화살촉에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발라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원에 집착하면 할수록 우리는 쉽게 행복과 불행, 사랑과 이별이라는 존재의 지각을 물리적 혹은 심리적인 것으로 환원하게 됩니다.
인간의 정신세계가 심리적 혹은 물리적인 것과 연관을 맺고 있다는 관찰은 대단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행복이나 긴장, 슬픔, 분노와 같은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우리의 삶의 한가운데서 해명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정신적인 작용과 그것의 물리적 환원 사이에는 우리가 쉽게 이을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합니다. 호르몬을 감정의 기원이라고 간주하는 동안 우리는 기계적으로 호르몬의 통제를 받으며 쾌락침대에 평생을 누워 있을 때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의 착각
실증학문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증명입니다. 어떠한 명제나 이론의 타당함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란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지 그 여부에 달려 있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이것은 학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이며,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논리로 확대 해석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선언은 명제와 사실, 이름과 대상의 일치만을 의미로 간주하고자 했던 시대적 흐름에 이정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이 태동되기까지에는 자체적인 노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함으로써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무분별한 논쟁이 밑에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증학문은 형이상학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증학문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뿌리에서부터 대체하였다고 보는 것은 대단히 순진한 생각입니다. 인식론의 양극단이라고 여겨지는 형이상학과 실증학문 사이에는 여전히 형이상학의 도도한 역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실증학문이 형이상학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과 언어로 형이상학의 역사를 계속 써 내려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소 터무니없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플라톤에서 시작된 형이상학은 실증학문이라는 마지막 정거장에 이르기까지 인류 정신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경험적 검증가능성을 표방하며 등장했던 실증학문은 인류가 이제 신화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진정한 현실세계에 살게 되었다고 공언하지만, 실은 여전히 자신이 빠져나온 그 신화의 세계에서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원이라는 신화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마치 거대한 늪처럼 우리를 휘감고 있는 기원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그 늪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제부터 추적해 봅시다. 형이상학이 출발하였던 지점부터 시작합니다.
존재의 세계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엇을 통해 지각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들은 형이상학이 자신의 역사를 통해 수 없이 되물었던 사고의 원천입니다. 그때 형이상학이 내놓을 수 있었던 최후의 논증은 ‘나’의 존재입니다. 왜 존재의 세계를 해명하기 위해 내가 필요한 것일까요? 우리는 앞서 하이데거의 길을 함께 걸으며 그의 답변을 들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흔적은 이미 앞선 선배들의 길 위에서도 도처에 발견됩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존재의 형이상학을 자연이나 절대자가 아닌 나의 의식위에 세우고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한 철학자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최후의 만찬』이 많은 미술가들에 의해 꾸준히 재해석되고 복제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드러냈듯이, 데카르트 이후 ‘나’의 존재는 형이상학이 펼칠 수 있는 최후의 논증으로 꾸준한 인기를 구가하며 자신만의 역사를 구축해 갔던 것입니다.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는 독일 고전철학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존재의 목소리가 곧 나의 목소리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화려하게 꽃 피었던 헤겔의 문화를 접으며 신이 죽었음을 선언했던 니체도 존재가 의존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초인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초인 또한 실은 인과의 법칙을 넘어서는 나의 의지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니체 또한 ‘나’의 형이상학자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맥락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바로 여기에서 근대철학을 특징짓는 주체의 어두운 철학이 등장합니다. ‘어두운’이라는 표현에 독자는 다소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이라는 표현은 충분히 그 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체의 철학이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을 인위적으로 조각내고 경계 지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의 사유체계에 다 동의하지는 못할지라도, 레비나스에 의해 소개된 타자의 얼굴은 주체의 철학이 잉태해낸 현실의 조각남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조각낸 경계의 이편과 저편을 우리는 근대 이후,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계몽의 시대 이후 숱한 이데올로기를 양산해 내었던 서구 정신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찾습니다. 인간과 자연, 신과 인간, 자본가와 노동자, 나와 너, 남자와 여자, 문명과 야만, 과정과 결과, 선과 악, 선진국과 후진국, 지배와 피지배 등은 아마도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추상화된 현실들일 것입니다.
지금 저자와 독자의 구별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이 살아 있는 삶을 화석화시키고 왜곡시킨 결정적인 이유는 한쪽이 주체가 되었고, 다른 한쪽은 객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객으로 분리된 삶은, 일찍이 헤겔이 지적하였듯, 죽음을 건 인정투쟁의 장으로 밖에는 지각될 수 없습니다. 무한경쟁 시대에 경쟁력을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이데올로기는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삶의 진리인 것처럼 들립니다. 주체는 오로지 객체를 통해서만 세상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허구처럼 들립니다. ‘너’가 부정된 곳에서 세계는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낯선 곳으로 변해 버린다는 생각은 좀처럼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설렘의 장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익숙한 적자생존이라는 삼류 드라마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형이상학이 어떻게 실증학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는지 그 통로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나’의 존재는 형이상학의 역사가 옷을 입으며 끼웠던 첫 단추입니다. 그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 첫 단추가 모든 왜곡의 시작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알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가 부정된 곳에서 우리는 어떠한 존재의 세계도 지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란 주관에 나타나는 관념에 불과하다는 독아론(獨我論)을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존재와 항상 더불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는 나의 마음이며 자연은 나의 육체입니다. 가정과 세계는 실상은 동일한 형상으로 이루어진 나의 고향인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반대급부로 마음의 편안함을 얻습니다.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인정하는 것은 그로부터 세계를 연역해 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문제는 마지막 단추입니다. ‘나’의 형이상학이 매듭지었던 마지막 단추는 그 옷을 입은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형이상학의 착각은 아마도 보이지 않고 말하여 질 수 없는 나의 존재를 보이는 나와 말하여 질 수 있는 나의 존재로 환원시킴으로써 발생한 듯 보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처럼 사고의 표현에 한계를 짓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한 마음의 착시현상인 것입니다. 도대체 형이상학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나의 존재란 무엇일까요?
나의 존재는 나에게 너무 가깝기 때문에 인식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나의 눈을 결코 볼 수 없을 겁니다. 나의 존재가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수많은 철학자의 사유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에 빠트렸습니다. 현대 존재론의 마지막 대가였던 하이데거조차도,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질문을 둘러싸고 자신의 사고를 전기와 후기로 분열시켰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존재의 세계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사유화시킨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의 실존적 모습이란 자신을 대상화하고 동시에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다는 점에서 실증적 기원을 넘어섭니다. 그 넘어섬은 당연히 경험적 대상을 지니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넘어섬에게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의미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존재의 세계는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인격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인격의 세계는 비록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지만, 인과의 법칙이 통과하는 보이는 세계보다 더 풍요로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지평,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적 노력이 도달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과거 형이상학적 사색의 고유한 영역이자 출발점이었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거쳤던 수많은 정거장들이 인격이라는 목적지에 이르는 필수 코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형이상학이 도달했던 마지막 정거장이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여행 중이라는 사실만이 우리에게 남겨진 위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하이데거의 지적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자신의 고유한 과제를 왜곡시킴으로써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상기해 봅시다. 플라톤의 주저『국가론』에 등장하는 동굴의 비유에는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론이 담겨 있습니다. 다소 길지만 그 내용을 요약해 보는 것은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속이 깊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동굴 속에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들 뒤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히 타오르는 모닥불이 있지요. 사람들의 목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기에 그들은 모닥불이 비친 벽의 그림자를 통해서만 자신들과 동굴의 세계를 인식합니다. 현상하는 그림자는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여 한 사람의 족쇄가 풀리게 되고, 그는 모닥불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눈이 부셔 통증이 생기고 다른 세계를 보는 데 주저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통해 듣고, 무엇을 보고 살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제 그는 자유의 여행을 시작하여 긴 동굴의 통로를 지나 실재 세계로 나아갑니다.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은 태양의 강렬한 빛에 잠시 어지러움을 느끼겠지만 태양 아래 펼쳐지는 대지의 아름다움이란 동굴의 그림자와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한 것을 들으며,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일이란 즐거운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Politeia, 514a–518b)
플라톤은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접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그 내용이 명백하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후대로 이어지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동굴의 비유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남기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해석만으로도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합니다. 동굴에서의 삶은 현상의 세계, 즉 경험에 의해 제한된 인간의 조건을 나타냅니다. 동굴 밖의 공간은 있는 그대로의 삶이 열리는 세계이지만, 동굴 안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이상의 세계입니다. 동굴 벽면에 그림자를 만드는 모닥불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일정한 공간과 시간을 관통하는 가치구조인 것이지요.
그런데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이후 형이상학의 역사에 엄청난 오류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충실히 추적해 가는 것이 곧 형이상학의 역사가 됩니다. 전체 과정에 대한 기술은 이 책의 과제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오류의 역사가 현대 정신과학의 위기를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역설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형이상학이 기원을 향한 자연적 욕망을 자신의 주된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진리의 세계란 존재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낼 때 지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유는 무엇이 드러나는지에 맞춰질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타자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낼 것입니다. 자연의 색은 단순히 흑백으로 이원화 될 수 없습니다. 그 다채로움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의 자연적 욕망은 드러나는 그 무엇을 보기 보다는 그것을 드러나게 하는 기원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왜곡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의 역사가 발생하는 정확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드러나는 기원으로서 태양이 지목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자연적인 생각이지만, 진리의 드러남을 결정적으로 은폐하는 인식론적 사유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어두운 곳에서도 밝은 곳에서도 나와 타인 그리고 자연은 동일한 나와 타인 그리고 자연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합니다. 존재가 드러나기 위한 조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빛을 발하는 태양은 존재가 드러날 수 있는 조건으로 간주되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야로 들어옵니다. 이것이 바로 태양을 존재의 기원으로 착각하게 되는 배경이 된 것입니다. 나와 타인 그리고 자연의 존재는 더 이상 동일한 나와 타인 그리고 자연의 존재가 아닌 태양의 부산물로 변해 버립니다. 태양은 빛의 원천이 되고 인식을 가능케 하는 가장 근본적인 본질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이상학의 두 번째 장이 그 화려한 막을 올리게 됩니다.
전통적 형이상학은 태양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것도 인과법칙이라는 현상과 결부된 선험적 법칙에 의거해서 말입니다. 그때부터 철학사는 기원의 형이상학이라는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합집산을 거치며 갈등이 소강상태로 접어들 때, 칸트라는 걸출한 인물이 철학사를 재편합니다. 태양과 같은 형이상학적 기원에 대한 진술은 결코 인식의 범주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비판철학과 함께 말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차적 기원에 대한 진술들이 난무하는 동안 존재의 세계가 조용히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무엇이 드러나는지, 혹은 누가 드러나는지는 더 이상 철학적 상상력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형이상학이 나의 존재론이 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기원의 주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식론으로 자신의 모습을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때 철학적 상상력의 역사는 폭력과 억압의 역사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와 세상의 기원을 향한 자연적 욕구는 신기루를 찾는 서투른 정신적 욕망에 불과합니다. 기원이라는 욕망에 갇혀 있을 때, 인간은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갑니다. 기원을 향한 집착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지각할 수 있는 우리의 정신과 몸마저 마비시켜 버립니다. 지각의 섬세함이 결여되면 타인도 자연도 그저 나에 대립하여 존재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나’라는 분리된 주체에 의해 자의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 조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기호 학자이자 뛰어난 문학가인 에코(Umberto Eco, 1932~현재)의 냉소는 작지 않은 울림을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형이상학의 역사를 보며, 진리를 비웃는 것이 오히려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자조 섞인 한탄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형이상학이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론이 되는 동안, 진리에 대한 언표는 독단론으로 변해 버립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형이상학을 기초부터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형이상학의 역사는 자신을 부정하는 역사이자, 동시에 다시 세우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애초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것에서 가장 먼 것까지, 가장 따뜻한 것에서 가장 차가운 것까지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눈에 보이는 것까지를 아우르는 존재의 지평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최종적 기원을 추구하였던 전통적 형이상학이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근거를 붕괴시키고 위기를 자초하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 볼 것입니다. 그것도 생물학이라는 실증학문의 옷을 입고 말입니다.
생물학적 인간관
생물학적 인간관은 형이상학적 상상력이 낳은 가장 강력한 인류의 자기이해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상당한 정도의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형이상학이 존재로서의 존재를 문제 삼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반면, 생물학과 같은 경험과 관찰을 주된 방법론으로 삼고 있는 학문은 눈에 보이는 것을 오로지 눈에 보이는 차원에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근본학으로서 형이상학을 정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형이상학과 생물학이 결코 연속적이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현대의 생물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그 자리위에 자신만의 존재학을 세운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생물학의 태도는 일정 정도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오직 동일한 것만이 동일한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서양의 합리론적 전통 때문입니다. 예컨대 눈에 보이는 않는 것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존재가 절대자입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서 중의 하나인 구약성경은 절대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애굽기3:14)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는 오직 ‘나’라는 동일자 이외에 어떠한 이름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형식적으로 거짓일 수가 없습니다. 논리적인 동일률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사실이 논리적으로 옳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다 유효한 것은 아닙니다. 위 문장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위의 문장은 분명 절대자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으로 불리기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장으로부터 절대자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일률에 근거한 동어반복으로 절대자를 묘사하는 것은 절대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절대자에 대해 아무런 언표도 하지 않은 것이지요. 이러한 사태가 인간의 이성 속에 내재된 인식으로의 욕구를 자극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이러한 사태가 형식 논리학에서 변증 논리학으로 나아가는 철학사적 흐름의 내적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계속 추적하는 것이 우리의 주제는 아니지만, 우리의 맥락과 연관된 부분만 간단히 언급해 보겠습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셸링의 통찰은 서양의 합리론적 전통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야코비와의 논쟁에서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의 범신론을 옹호합니다. 신은 절대자이자 모든 것입니다. 그를 벗어난 그 어떤 것도 존재론적 토대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정황은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도 정확하게 적용됩니다. 인간이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신이 그와 동일한 것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란 신의 자기인식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동일률이라는 형식논리가 스피노자의 범신론에서 그리고 헤겔에 의해 수행된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논리에서 정확하게 재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형식논리에 인간의 시간이 덧붙여진 형태로 말입니다.
실증학문으로서 생물학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데는 대단히 인색합니다. 이론적으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자기 완결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닫힌 체계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그럴만한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다.”
생물학적 인간관이 전제로 삼고 있는 공리입니다. 기존의 형이상학적 인간관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여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 즉 이성을 지닌 신적 존재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생물학적 인간이해에 비추어 본다면, 형이상학의 인간에 대한 믿음은 글자 그대로 주관적 믿음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적 이미지란 정신의 근거 없는 허구일 뿐이라는 겁니다. 생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추구하였던 형이상학을 신화라는 이름의 미신으로 해체시켜 버린 겁니다. 문제는 그러한 해체의 과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사태가 그리 간단해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생물학적 방법은 인간의 행동양식을 생태계에 통용되는 자연의 법칙으로 해석해 내는 것입니다. 언뜻 생물학적 인간이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비판하며 등장한 실증학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근대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달이 생물학적 인간이해의 주된 동력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학문적 용이성과 실용성은 그것의 현실 적합성을 가속화 시킵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점은 가장 과학적 학문으로 불리는 생물학적 인간이해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전통적 형이상학이 여전히 동일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오히려 생물학적 인간관이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뿌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뿌리는 기원으로의 욕구라는 자연적 태도입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원을 추구하였다면, 생물학적 인간관은 검증 가능한 증거, 이른바 눈에 보이는 기원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 유일한 차이일 것입니다. 하지만 기원의 대상과 종류가 달라졌을 뿐 두 거대 담론은 존재를 심리적 혹은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존재의 세계에 대항하여 서로 공동전선을 형성한 채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두 이론은 한배를 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둘 다 기원을 통해 존재의 드러남을 처음부터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발짝 더 나아가 봅시다.
생물학적 인간이해는 오늘날 객관적 인식을 얻기 위해 달리는 주자들 중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지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생물학적 인간관이란 학문에 가장 부응하는 인간관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대단히 광범위한 학문의 영역이지만, 앞서 밝혔듯, 공통적인 출발지점은 인간의 모든 삶의 양태를 야기하는 생물학적 기원을 추적해 가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삶을 생물학적 원인과 결과로 환원시켜 설명합니다. 이와 관련된 좋은 예들이 수시로 우리의 시야를 현란케 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최근의 기사입니다. 자살을 부추기는 변이유전자의 발견에 관한 논문입니다.
“미국의 의학뉴스 매체인 메디컬 뉴스 투데이는 29일(현지시간)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대 정신의학·행동과학 교수 버지니아 윌로우어 박사가 조울증 환자의 자살기도 위험을 높이는 변이유전자를 제2번 염색체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조울증은 양극성 장애라고 불리는 것으로, 기분이 들뜨는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 나타나는 정신장애를 가리킨다. 윌로우어 박사는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는 조울증 환자 1201명과 자살을 기도한 일이 없는 조울증 환자 1497명의 DNA를 분석한 결과, ACP1 유전자 두 쌍 가운데 하나가 변이된 사람이 자살을 기도할 위험이 1.4배, 두 쌍 모두 변이된 사람이 3배 정도 각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윌로우어 박사는 "자살충동 변이유전자의 발견이 자살행동을 억제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이 연구결과는 의학전문지「분자 정신의학」(Molecular Psychiatry)’ 최신호에 발표됐다.(마이데일리, 2011, 03, 31)
자살과 관련된 유전자 변이의 발견이 세간의 이목을 끄는 이유는 그것이 자살을 억제할 수 있다는 실용성 때문입니다. 유전자 변이에 인위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자살충동을 억제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이러한 실증적 연구는 대단히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살의 원인을 유전자 변이라는 물리적 현상으로만 환원시킴으로써 존재의 사건으로서의 자살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침묵합니다. 왜 한 개인이 자살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단순히 심리적,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의 발생입니다.
자살은 때로 소극적 형태로 진행됩니다. 삶의 빈곤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연적 욕구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질적 빈곤, 정신적 아노미, 인간관계의 실패로부터 오는 정신적 공허, 아무것도 아닌 자로 변해 버린 정체성의 부재 등은 대표적인 삶의 빈곤들입니다. 정신적 빈곤함의 뿌리 속에는 사회적 가면과 본래의 얼굴이 맺고 있는 부적절한 동거, 즉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역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실존에 내재된 분열을 의미로 채우는 과정이이란 이러한 역설의 관계를 바로 잡는 과정일 것입니다.
반면 자살은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적극적인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의미를 세상으로 불러오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랑과 전쟁의 한 장면을 연상해 봅시다.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사랑하는 연인을 데리고 다리를 건너는 한 병사가 있습니다. 다리를 다 건너갈 무렵 병사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집니다. 그는 적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무사히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합니다. 그때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함께 적군의 추격을 뿌리치려 시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때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리고 연인에게 소리칠 것입니다.
“내가 시간을 벌 테니 빨리 이곳을 떠나라.”
병사는 자신의 생물학적 소멸이 임박했음을 느끼지만, 그 시간이 다가올수록 자신의 삶이 의미의 전체 가운데서 실현되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사랑의 힘이지만, 자신의 전체를 던져야만 이루어낼 수 있는 존재의 힘이기도 하지요. 한 개인의 실존에 내재하는 존재론적 차이, 그리고 두 자아로의 분열은 삶의 의미가 실현됨으로써 하나로 묶여지며, 그 병사에게는 소멸의 시간이 곧 행복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원으로의 추구가 왜 존재의 망각으로 이어지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기원을 추구하는 자연적 욕망은 그 자체로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기술문명은 그것을 숭배합니다. 기원으로부터 존재가 해명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의 결과는 존재의 망각입니다. 존재란 기원이 아니라 의미를 먹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흔히 생물학과 같은 실증학문은 경험적 관찰이 존재로부터 가장 가까운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기원은 존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반면 의미는 존재의 한가운데서 발생하지요. 자살 혹은 죽음은 존재의 한가운데로 진입하는 통로입니다. 죽음을 배우는 과정은 의미의 경험을 가능케 해주며 실존 자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나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실존을 목적 자체로 인정하는 행위는 의미 있는 삶 가운데 최고의 형태이며, 어쩌면 이것은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깨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감정을 관장한다고 여겨지는 호르몬에 대한 생물학적 정보도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은 행복을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입니다. 노르아드레날린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도파민은 쾌락을 느끼게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신경전달물질의 발견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조울증 환자의 치료에 요긴하기 때문이지요. 과도하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들을 조절할 수 있다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일컫는 신경증은 충분히 치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도파민이라는 기원의 발견은 행복이라는 존재의 사건을 근본에서부터 파괴해 버리기도 합니다. 마약과 같은 향정신성의약품들의 남용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도파민을 과도하게 분비시켜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정신적 쾌락은 행복이라는 존재의 의미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자연적 욕망이 뿜어내는 행복으로의 과도한 집착은 존재를 왜곡시킬 뿐입니다. 그 결과는 치명적인 중독입니다.
행복이란 의미 안에서 자라나는 존재의 사건입니다. 단순히 불쾌의 부재만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절망과 외로움, 거절당함과 이별, 실망과 체념은 행복의 건너편이 아닙니다. 존재의 발생은 서로 부정하는 듯이 보이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서로 얽혀서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줍니다. 가장 어두웠던 인생의 시기를 보내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바로 그 시기가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했던 존재의 한가운데였음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기원으로의 집착은 인간의 행복이 존재의 한가운데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행복은 ‘좋음’에 대한 가치와 연관이 있습니다. 동물은 무언가를 욕구하며 그것이 충족될 때 만족을 느낍니다. 여기에는 사실상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 속에 어떠한 형이상학적 목적도 숨어 있을 수 없다는 생물학자들의 주장은 어떤 측면에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단순히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동물에게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이라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동물은 단지 삶을 위해 삶을 살아가는 자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단순히 욕구의 충족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목적적으로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연적 조건에서 벗어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연적 조건과 내적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행여 자연적 상태에 처한 인간을 볼 때 우리는 안타까움을 전합니다. 인간이 자연적 조건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삶을 구현하기 시작한 경계점이 바로 가치의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였다면, 그리고 인간에게 신적인 어떤 요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 가치창조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가치부여란 자연의 단순한 ‘있음’에서 ‘좋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며, 무(無)에서 유(有)에 이르는 창조적 행위인 것입니다.
인간적 행복이란 윤리적 행위의 대가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 자체라고 통찰했던 철학자들의 논의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단순한 ‘있음’에서 ‘좋음 agathon’으로의 전환은 서양 고대철학의 가장 중심된 주제였으며, 인간적 행복이 어디서부터 유래하는지를 반성하기 시작한 첫 단추였던 것입니다.
생물학적 인간관은 모든 존재자의 기원을 추적합니다. 대표적으로 화석의 언어를 예로 들어 봅시다. 지질시대의 퇴적암 안에 퇴적물과 함께 굳어진 동식물의 유해나 흔적은 단순한 돌덩어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겹겹이 쌓여 있는 시간의 놀라운 의미를 알려주는 언어이지요. 우리는 그 언어를 읽고 의미를 추적해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계보학을 따지며, 계통적 발생을 통해 존재가 어디서 시작했고, 어디로 흘러갈지를 추측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을 인과관계로 설명하는데 익숙해져 갑니다. 모든 것은 그럴 만한 생물학적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장 정확한 과학적 지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생물학적 인간관은 오랜 시간을 걸쳐 진화해온 인간의 지위 또한 일정한 법칙에 의거하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절대적인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은 결국 직립보행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뇌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다양한 생활환경을 창조해냈고, 결국 도구와 문자 그리고 문화의 토대가 되는 상징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자신에게 존엄성이라는 형이상학적 권리를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면서 그 의도와는 반대로 인간적 삶을 왜곡했다면, 이제 생물학적 인간관은 가장 확실한 실증적 증거를 통해 인간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인간과 동물의 유사성에 대한 학문적 탐구는 보다 깊은 인간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재미있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부일처제(monogamy)는 오늘날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법적인 혼인체제입니다. 누가 그리고 왜 일부일처제를 주창하고 지지했을까요? 어떻게 그것을 고집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을까요? 남성에 대한 여성의 경제적 종속과 성적 종속을 제도화한 것이 일부일처제라는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의 지적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자본주의의 도래와 함께 여성의 성은 남성의 상속권과 가문계승이라는 사회경제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고, 여성에게는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하기 위해 순결과 정절의 의무가 강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일부일처제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자연적인 것이란 무엇일까요? 생물학은 여기서 윤리적 ·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인류 출현 이래 사라지지 않는 외도욕구에 주목합니다. 본능처럼 현대사회에 붙어 다니는 외도욕구는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생물학은 상당히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론적으로 유전자적 다양성의 확보가 그 근거입니다. 바람을 피우는 인간들은 더 우수한 후손을 남길 수 있는 개연성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우수한 유전자를 남기고자 하는 진화의 본능은 실제로 보다 깊은 인간 이해를 가능케 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더 강하고 매력적인 자손을 낳기 위해 남성은 되도록 많은 여성들과 성적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남성에 비해 신중한 이유는 자녀에 대한 양육의 책임을 본능적으로 더 많이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예가 영아살해(Infanticide)입니다. 영아살해는 인류의 역사에서 오랜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출산을 통제하기 위한 원시적인 방법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 이른바 기형아를 제거하는 수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은 그리스 · 로마 · 근동의 고대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영아살해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법적으로 금지되고 있습니다.
2006년 한국과 프랑스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서래마을 영아살해도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생물학적 관점에서 영아살해를 살펴보면 사태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한 개체의 몸은 다른 개체의 몸을 부양할 수 있을 만큼만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생물학적 공통분모가 인간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자연의 원리라면 사정은 매우 달라집니다. 정상참작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선으로도 악으로도 재단될 수 없다는 불문율을 우리는 여전히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아살해가 십대 미혼모에게 압도적으로 많이 발생한다는 실증적 통계는 이러한 판단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인간 이해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자연적 추구가 존재의 망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다음은 참여문학의 기수였던 브레히트가 우리에게 남겼던 자신의 마음입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살아남은 자의 슬픔, 1944년)
그의 불편한 마음은 우리의 마음까지 불편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고개를 돌려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존재의 진실을 우리로 하여금 직시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인간사회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적 삶은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느꼈을 시대의 부조리와 아픔은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자생존의 현실에 안주하며 더 강한 자가 되기 위해 애쓰던 자신과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표현입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과 관계를 맺음으로 생물학적 기원을 넘어서는 존재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되는 것입니다. 유감을 표함으로써 우리는 적자생존보다는 더 풍요로운 존재의 영역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유감을 표함으로써 살아남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는 나의 존재를 용서할 수 있으며, 그것은 나를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실존의 분열이 의미로 메워져 가는 것이지요.
인간적 시간의 의미,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의미가 단순히 우성인자를 남기고자 하는 자연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삶의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실존의 분열은 허무적 세계관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생물학적 인간관을 대변하며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도킨스,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 마이어 등은, 약간의 굴곡을 제외한다면, 한 진영을 구축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굳건히 붙잡고 있는 동아줄은 유전자입니다. 유전자 안에 인간 진화의 화석이, 그것도 시간의 의미가 감춰져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도킨스에 따르면, 생명체는 DNA의 생존을 지속시키는 것보다 더 높은 목적이 없다고 합니다. 생명체에는 단지 맹목적이고 냉혹한 무관심만 있을 뿐, 설계, 목적, 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맹목적이고 물리적 힘, 그리고 유전적 복제의 우주에서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입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운이 좋을 것입니다. 그 속에는 어떠한 분별이나 이유, 혹은 어떠한 정의도 발견할 수 없다는 색조가 그의 저서를 어둡게 칠하고 있습니다. 진화의 궁극적인 무목적성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역사는 자연에 단지 약간의 오염을 일으킬 뿐이며, 우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 세계는 거의 동일할 것이라는 허무적 세계관은 화룡점정(畵龍點睛)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한다는 것
우리는 인간에 대한 실증적 이해가 인간 정신의 위기를 낳았다는데 대체로 동의합니다. 중요한 건 무언가를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잊혀진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 내야만 하는 것일까요?
잊혀진 것은 인격적 정체성이며, 기억해 내야 하는 것은 존재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격적 현실이라고 부릅니다. 혹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기원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추상적 단면에 불과합니다. 그 단면으로 현실을 지각하려고 하는 태도는 왜곡만을 불러옵니다. 형이상학이 존재를 존재자로 환원시켜 현실을 왜곡하였다면, 그 반대편에서 출현한 실증과학은 존재자를 존재로 환원시켜 현실을 은폐한 것입니다. 양자가 모두 기원으로의 욕구로부터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철학적 상상력의 과제는 이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복원해내는 것이 됩니다. 다시 생물학으로 돌아가 봅시다.
태아란 임신 초기부터 출생 시까지의 임신된 개체를 의미합니다. 수정 후 2주 후부터 8주까지는 배아(embryo)로, 수정 8주 이후부터 출생 때까지는 태아(fetus)로 불리지요. 이때 태아의 크기는 대략 4cm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태아는 인격체일까요? 생물학자에게 태아는 일련의 세포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경험론적 인격이론을 설명하면서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태아는 인격체로서의 객관적 기준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태아는 일정한 기간까지는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싱어는 인격체로 인정받기 위한 보편적인 윤리기준으로 이성과 함께 고통을 주장합니다. 태아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단순한 세포덩어리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장애태아를 제거 한다고 해서 윤리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히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생물학자는 태아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세포복합체 정도로 지각할 수 있습니다. 태아를 자신과 분리된 대상으로 여기는 과학자이니까요. 하지만 그 세포 덩어리를 몸속에 품고 있는 임산부는 현실을 어떻게 지각할까요? 태아는 단순히 세포덩어리가 아니라 완벽한 인격체로 지각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 내야만 하는 현실입니다. 이 차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의미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철학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잊혀져버린 인간적 현실을 다시 지각하고 이를 정확하게 묘사해내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현상학은 우리가 눈여겨봐야 되는 현대의 사상적 흐름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왜 본질이 아니라 현상일까요? 눈에 보이는 현상이 문제라면 생물학적 인간관이 오히려 더 적합한 학문이 아닐까요? 왜 현상학은 생물학과 같은 실증학문의 현상에 대한 객관적 진단에 애써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일까요? 우리는 실증학문이 분석해 내는 현상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복원해 내려는 현상학의 현상과 전혀 다른 맥락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생물학적 인간이해는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경험적이고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기원이라는 우상이 제일 원리로 등장한 것은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정보가 인과의 법칙을 통과하며 객관적 검증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지식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객관적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과연 객관적인 사실일까요? 실증학문은 정말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혹은 실증학문이 사용하는 객관성이란 어떠한 의도된 맥락을 전제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 과학적 세계관을 위해 체계적으로 철학적 기초를 놓았던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의 논변을 기억해 봅시다.
콩트는 인류 역사의 발전을 3단계에 걸친 의식의 발달과정으로 분류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자연적인 종교의 형태에서 시작합니다. 그 후 형이상학적 단계에 머무르다가 최종적으로 실증적 영역에서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과제를 완성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형적인 진보적 사고가 콩트가 사용하는 주된 패러다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추구하며 소모적인 사상적 논쟁만을 야기했던 형이상학을 종식시키기 위해, 그는 눈에 보이는 객관적 사실 자체만을 탐구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는 형식 논리학은 콩트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자연의 원리입니다. 귀납적으로 증명된, 이른바 인과의 법칙에 의해 검증된 것이 현상이며,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지각으로 들어오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객관적 진리에 대한 추구는 철학적 상상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진리의 영역에서 인간의 주관적 의식을 추방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실증주의적 사고는 인간의식의 주관성이 개입될 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일체의 인간적 주관성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객체들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미의 세계는 인간에게 필요한 주관적 구성물일지는 모르지만, 진리는 주관적 의미부여 이전에 이미 현실로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실증주의는 인간의 정신과 현실을 정확하게 양분하여 고찰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중심으로 회전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현실을 구성하는데 어떠한 영향도 행사할 수 없는 독립된 주체일 뿐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주관이 개입될 때 현상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실증학문이 말하는 현상이며 객관성의 척도입니다.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일체의 주관적 개입을 차단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실증학문이 객관성을 추구하며 화려하게 비상하는 동안, 철학적 상상력은 자신의 고유한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식의 원리로서 인과의 법칙만이 허용되는 곳에서, 인간은 의미창출이라는 자신만의 고유한 주체성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실증주의적 사고 아래에서 인간은 기계적 인과율에 따라 모든 것이 설명되는 사물들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쉽게 이것이 심대한 존재의 왜곡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세계가 우리에게 펼쳐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면, 그것은 주체로부터 분리된 추상화된 대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실증학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객관적 현상이 진정 있는 그대로의 현실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앞서 우리는 인격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인간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개별자로서 실존하는 인간을 ‘무엇’이라는 사물로부터 구별하고, 그에게 정당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코자 하는 철학적 시도는 인간에게서 주체성을 빼앗고 단지 주어진 것을 강요하는 실증주의적 사고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인격으로서 개별 실존은 사물과 같이 가치로 매겨지는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거부는 생물학적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단순한 자연적 저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로부터 나오는 존재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이 존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자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현대의 현상학적 흐름은 그 흔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시 현상학에 대해 고찰해 봅시다.
현상학은 실증주의적 학문에 의해 분리된 주체와 객체를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다시 결합하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사조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서 후설이 현상학의 선구자임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이 분야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가깝게는 헤겔이 이미『정신 현상학』이라는 주저를 통해 개념적 단초를 밝힌 바 있으며, 멀게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 또한 진정으로 주어진 현실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각을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사 전체가 실은 현상학이었던 것입니다.
후설과 지향적 의식
현상학의 중심을 관통하는 ‘지향성’이라는 개념 또한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던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에게서 유래합니다. 후설은 이것을 조금 손을 보고 다듬어서 자신만의 독특한 요리로 고객들에게 제공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황들이 20세기 현상학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기수로서 후설 현상학의 시대적 의의를 삭감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철학적 상상력은 현상학을 도외시한 채 전개될 수 없습니다. 후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인식론적 경향을 비판하고 존재론을 덧씌움으로써, 현상학의 색조를 실존적 분위기로 바꾸어 놓습니다. 특히 이것이 20세기 정신의 왕자들을 매혹시켰습니다.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독일의 현상학을 비판하며 등장하였던 20세기 프랑스 현상학도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하이데거 철학의 주석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진단은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요. 프랑스 현상학을 대표하는 사르트르,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레비나스, 심지어는 해체주의 선봉장인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철학적 상상력이 단순한 모방이나 훈고학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의 철학은 충분히 창의적이며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독창적인 자기 완결적 구조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정해야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하이데거의 그림자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직접적이든 혹은 간접적이든 하이데거에 대한 선이해가 결여된다면, 우리는 그들의 텍스트가 걸쳐있는 존재론적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독일의 현상학과 프랑스 현상학은 동일한 존재론적 지평 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때, 우리는 독일과 프랑스 현상학이 지니는 정신적인 차이점도 주목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후설의 현상학적 상상력이 우리의 주제와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 살펴봅시다. 실증주의적 사고는 객관적 현실을 얻기 위해 나와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양분하였습니다. 정신적인 실체의 본성은 사유하는 것(res cogiton)이며 물질적인 실체의 본성은 연장된 것(res extensa)이라며 세계를 통 크게 양분하였던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실증주의가 취하고 있는 인식론적 토대입니다. 이원론적 인식론의 궁극적 목표는 아마도 객관적 현실을 취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후설은 여기서 객관적 현실을 얻으려는 시대적 과제가 과연 인식의 주체를 존재론적으로 배제한 채 가능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 질문과 함께 후설이 독단적으로 전제된 어떠한 형이상학적 일점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후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태 그 자체로 zu den Sachen selbst’ 돌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객관적 현실을 얻기 위해 진정으로 우리가 인식의 주체를 배제해야만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설의 현상학은 실증주의적 사고에 의해 분리된 주관과 객관의 두 극은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논증함으로써,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주관과 객관이 겹쳐진 일종의 지평이라는 것입니다. 그 지평을 기억함으로써 그는 인간정신의 고유한 영역인 의미의 세계를 회복시키려고 시도합니다. 현상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이해하기 쉬우며 일반적인 정의는 실은 후설이 아니라 그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프랑스 현상학자 메를로퐁티에 의해 표현됩니다. 조금 길지만 그의 정의를 징검다리 삼아 나아가 봅시다.
“현상학, 그것은 본질에 대한 연구이며 모든 문제는 현상학에 따르면, 본질을 규정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지각의 본질, 의식의 본질 등등. 그러나 현상학, 그것은 또한 본질을 존재의 자리에 다시 놓아두는 철학이자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사실성’에서 출발함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고 믿는 철학이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연적 태도의 단정들을 미정으로 놓아두는 선험적 철학이기는 하나, 또한 반성 이전에 세계가 언제나 ‘이미 거기에’ 양도할 수 없는 현전으로서 존재함을 밝히고, 세계와의 소박한 접촉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며, 궁극적으로 그 접촉에 철학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철학이다. 그것은 ‘엄밀학’이고자 하는 철학의 야심이기는 하나 동시에 ‘체험된’ 공간, 시간, 세계에 대한 보고이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경험을 과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가 제공할 수 있는 심리적 발생과 인과적 설명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직접 기술하려는 시도이다.”
논점은 한가지입니다. 세계와의 소박한 접촉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후설은 이 소박한 현실을 얻기 위해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의식이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현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지평이기 때문입니다. 개별자로서 실존의 의식은 삶의 테두리가 미치는 범위입니다. 이를 통해 지각된 대상은 그 테두리를 구성하고, 우리에게 객관적 현실의 한쪽을 열어서 보여줍니다.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의식하면 그만큼의 현실이 우리의 지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지요. 인간의 실존이란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일정한 대상과 그만큼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식과 대상이 존재론적으로 겹쳐져 있는 관계성을 후설은 ‘지향성’이라고 부릅니다.
지향성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의식을 다루는 철학사에서 방법론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향’이라고 하는 단어는 행위의 의도라는 일반적인 언어사용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뜻입니다. 흔히 현상학에서 인간 정신에 내재된 지향성이 언급될 때, 이는 인간이 어떤 의도나 의향을 쫒아가는 존재라는 사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향성이란 대부분의 인간의 정신적 사태들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정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보자면, 모든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나는 무언가를 생각합니다. 때로 나는 무언가를 보기도 하지요. 어떤 것을 희망하기도 하며, 무엇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언급하고 있는 일상적인 예들은 지향성 개념을 설명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른바 나의 생각은 항상 일정한 대상에 관한 생각이며, 나의 시야는 대상을 전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며, 나의 희망이나 거절도 항상 어떤 것과 연관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자명한 사태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명함이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난제를 던져줍니다.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정신은 대상과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일까요?
지향성 개념은 후설 현상학의 중심 주제이자 동시에 인간 의식에 관한 이론입니다. 순수 논리학 서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논리연구 Logische Untersuchungen』는 이와 관련된 후설의 철학적 연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자, 그를 철학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저서 제1권에서 후설은 심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순수 논리학을 각종 경험학문으로부터 구제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그의 꿈이 서려 있는 마지막 종착역은 저서의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는데, 객관성의 가능조건에 대한 고찰이 그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위해 철학자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습니다. 그의 답변은 실증학문이 추구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른바 사물의 본질, 과정, 원인과 결과, 공간과 시간 등이 주된 물음의 대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설은 방금 언급한 대상들의 본질이 의식의 본질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하여 철학자의 과제란 의식작용과 그 대상 사이의 관계와 의식 속에서 어떻게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구조들이 구성되는지를 밝히는 작업으로 좁혀지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후설이 경험학문과 심리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평생 4만장이 넘는 수고(手鼓)를 남기게 되는 근거가 됩니다.
어쨌든『논리연구』제2권은 의식작용과 대상의 관계조명이라는 과제를 안고 시작합니다. 후설은 그의 연구를 ‘표현과 의미’(Ausdruck und Bedeu
tung)라는 주제를 가지고 출발합니다. 이것은 후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호기능을 넘어서는 우리의 일반적인 언어사용을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개별성을 넘어 보편성으로 진입해 갈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황은 후설 현상학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후설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결정적인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이른바 언어에 대한 집착이 후설 현상학을 철저하게 인식론의 틀 안에 가둬버렸기 때문입니다. 일단 계속 진행해 봅시다.
인간의 모든 인식이란 언어적으로 매개된다는 사실이 후설에게는 어두움 속에 한 줄기 빛과도 같았을 겁니다. 표현들이란 무엇일까요? 표현들이란 말하여진 단어들, 문장들, 저서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대화에서 선행하는 어떤 것에 대한 표시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후설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 단순한 표시와 어떤 것을 의미하는 표현들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표현이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의미가 부여된’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음성학적인 음운의 나열은 그것이 의미를 통해 영혼으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결코 표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의미는 어떤 대상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후설은 물리적 기호, 그것을 고지하는 심리적 체험들, 그것의 의미와 대상들을 구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후설은 현상학을 실재론에 입각하여 전개하는 듯 보입니다. 내가 정신적 작용에서 불암산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 작용은 불암산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나의 의식 외부에 놓여 있는 물질적인 대상으로서 불암산 자체가 주관인 나의 체험이 지향하는 객체가 되는 셈이지요. 행여나 내가 신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동물을 생각한다면, 체험의 지향성은 내 의식의 밖에 존재하는 대상과의 관계에 놓여 있지 않게 됩니다. 조금은 복잡하지만 문제는 이때 지향성이 순수하게 의식의 내적 속성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특히 외부 대상에 의해 의존하는 의식작용의 내적 속성 말입니다. 여기서 후설은 자신의 현상학이 출발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정신은 대상과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의식이 대상과 항상 동일한 지평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의 확인만으로는 ‘왜 그리고 어떻게’ 라는 질문에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후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험적 선회’라고 일컬어지는 사고의 전술적 전환을 감행합니다. 기존의 실재론적 사고를 과감히 포기하고 말입니다. 지향적 대상이란 더 이상 의식작용이 향하고 있는 외적 실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체험의 내용을 구성하는 일정한 요소, 즉 노에마(Noema)의 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의식체험의 지향적 성격은 이제 내면화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외적으로 주어진 것에 의존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노에마는 분명 일정한 대상이나 사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노에마의 이러한 기능이 의식의 외부에 놓여 있는 대상과의 일치여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후설이 이러한 사유의 선회를 통해 실재하는 대상을 부정하려는 의도를 표명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방법론적인 선회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의 의식적 판단이 옮은 것이라면, 노에마의 미션은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항구에 성공적으로 정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판단일 경우에는 어떨까요? 당연히 노에마의 매개 작업은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후설이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얻으려 했던 과제는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의식의 지향적 성격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의식이 지향하는 노에마가 현실을 추상적으로 반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후설은 이 부분에서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은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직관은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이제 본격적으로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후설 현상학의 체계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분석은 여기서 멈춰야 됩니다. 우리의 주제가 다루고자 하는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후설 현상학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려는 의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제가 그것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사유과정이 둘러싸여 있는 인식론적 틀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인식과 사물의 일치라는 전통적인 인식론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식은 그 본성상 있는 것에 관계하여,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경구는(Politeia, 477b) 후설이 감히 거역할 수 없었던 정신사의 절대적 흐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이미 진리를 앎의 문제가 아니라, 드러남의 과정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진리가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과정에서 우리의 의식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식이 진리가 드러나는 과정의 부분임과 동시에 전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다음 장에서 후설의 계속되는 사유여정을 그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각도로 각색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그의 현상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입니다. 먼저 지향성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부터 출발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후설이 소위 객관적 현실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의 주제와 연관시켜 다시 복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식과 세계의 관계망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매순간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익숙함과 낯섦, 멈과 가까움, 익명과 주체, 조연과 주연 그리고 우연과 필연이라는 삶의 다양한 경험들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정열, 희망 그리고 기쁨을 만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좌절과 권태 그리고 무기력에 빠지기도 하지요. 세계와의 친숙함이 나의 실존을 편안하게 감쌀 수도 있지만, 그 친숙함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던 자본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노출되어 추위에 떨 수도 있습니다. 타인은 우리의 시간을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우연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애처로운 눈초리에 이끌려 불현듯 내가 그의 손을 붙잡을 때,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필연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같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렇게 세계 내에서 그 무언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무언가가 우리가 ‘이미 세상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줍니다.
형이상학이 상정하는 절대적인 실체를 본뜨지 않고도 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에 있으며, 과학적 실증주의가 추적했던 객관적인 기원을 인용하지 않고도 우리의 삶은 언제나 그 무언가를 던져줍니다. 어떤 사회적 관념이나 조건에 어긋나서 우리의 정체성이 소외될지라도, 그 자리에는 무(無)가 아닌 무언가가 남습니다.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였던 형이상학이나 생물학적 기원에 목말라 했던 실증주의의 역사가 밝혀냈던 수많은 인간에 대한 형상들은 어떤 측면에서 그 무언가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존재의 풍요로움을 존재의 단면으로 추상화시켰던 것이지요. 지향성은 추상화된 단면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던져진 의식의 한가운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현상학의 창시자였던 후설은 현상에 대한 위대한 관찰자였습니다. 비록 그가 인식론이라는 자기한계에 묶여 전통의 노예로 남았을지라도, 그의 현상학은 그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근원적인 질문이나 객관적인 증거들이 오히려 현실을 일그러진 틀 속에 가둘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했습니다. 어떤 조건을 부여하거나 기원을 상정하면 그것이 뚜렷한 한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조건과 기원이라는 한계에 묶여 있을 때, 우리의 의식은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지평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는 굴레로 전락합니다. 현상학은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연적 욕망으로서의 기원에게 과감하게 괄호 치기를 단행합니다. 형이상학적 혹은 생물학적 기원들이 인식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과감하게 유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지각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펼쳐내고 그 단면을 기술합니다. 삶이 어떤 이론을 전제하지 않고도 펼쳐내 보여줄 수 있는 인간적인 모습들을 그대로 긍정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한, 이른바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지각이며 동시에 의미의 발견이었던 것입니다.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자가 직접 겪었던 경험을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저자가 한참 서양철학이라는 거대한 산을 숨 가쁘게 오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의식 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독특한 경험이 있습니다. 언젠가 나에게 헤겔을 가르쳤던 교수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의 강의 기법은 대단히 독특했습니다. 비록 도중에 다른 분야로 말을 갈아타긴 했지만, 저자는 철학을 배우던 대부분의 시간을 오직 헤겔을 알기위한 집념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강의 내용은 매우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물론 그 훌륭함이라는 것이 그가 이해하고 있는 헤겔에 대한 독창적 인식인지, 그의 강의기법에서 나오는 카리스마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식으로 헤겔을 이해했는지 지금 전혀 내가 기억해 낼 수 없는 것을 보면, 그의 해석은 나에게 그리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수업과 관련된 내 기억 속에는 왜 ‘훌륭함’이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의 교수법 탓인 것 같습니다. 그의 교수법은 매우 독특한 것이어서, 지금도 생생하게 복기(復棋)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강의실에 들어올 때부터 그는 남다른 장면을 연출합니다. 그의 등장은 처음부터 수강생들의 입가에 미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먼저 눈을 지그시 감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눈을 감고 들어왔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강의를 듣는 내내 나는 강의실에 있는 그와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쳐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거두절미한 채 그는 뒷짐을 지고 강의를 시작합니다. 주어진 두 시간 동안 마치 시계추가 움직이듯 정확하게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말입니다. 벽 앞에서 자로 잰 듯이 방향을 바꿀 때의 그의 모습은 마치 제식훈련에 이골이 난 일등교관 같습니다. 학생들이 어떠한 모습을 보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세상일에 달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강의시간 내내 헤겔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전달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다시 가져온 책을 집어 들고 퇴장합니다. 이때조차도 그는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있습니다. 강의가 끝났다는 사실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궁금하기만 합니다.
너무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물론 그의 이러한 독특한 강의 방식이 우리의 주제는 아닙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형이상학적 혹은 실증적 관점에 비추어 본다면, 그가 집에서 홀로 준비한 헤겔에 관한 전문지식은 일단 강의의 본질이 될 것입니다. 혹은 그가 왜 이 강의를 맡게 되었는지에 관한 다양한 근거들이 강의의 기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수업 내용으로 학생들에게 제공되고 지각될 것입니다. 수업과정은 두 시간에 걸친 그의 독백이 메워지겠지요.
이렇게 분석된 강의라는 현실은 정확하게 주체와 객체에 의해 양분됩니다. 주체는 홀로 강의를 준비한 교수의 몫이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이는 학생들은 객체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이 강의는 어떤 모습으로 지각될 수 있을까요? 오늘날 한국의 대학에서 흔히 행해지는 강의평가는 이렇게 주체와 객체가 양분된 현실을 염두에 두고 펼쳐지는 선택지들입니다. 다음은 한 대학의 강의 평가 선택지들입니다.
1. 교수님의 수업준비가 충실하였으며 성의 있게 수업을 진행하였다.
2. 토론/세미나의 주제 및 방식을 체계적으로 구성하여 진행하였다.
3. 교수님은 수업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학생과 상호작용(질의응답, 수업 참여 유도 등)을 활발히 하였다.
4. 수업과 관련하여 필요한 경우, 수업시간 외에 교수님과의 의사소통 방법이 제시되었다(면담, 이메일을 통한 질의응답 등).
5. 과제물과 시험은 학습에 도움이 되었고, 과제물에 대한 피드백도 잘 이루어졌다.
6. 이 수업을 통해 해당 분야의 지식과 안목이 향상되었다.
이 기준에 의거해 보면 주체로서 헤겔을 강의한 교수의 수업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거의 낙제점을 받지 않으면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학생들과 어떠한 상호작용도 하지 않았으며, 학생들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어떠한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달했던 헤겔에 대한 전문지식이 지금 나의 기억 속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을 보면, 해당 분야의 지식과 안목이 향상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전부일까요?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드러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일까요? 오랜 시간이 경과된 뒤에도 나에게 헤겔을 떠올리게 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의 헤겔 강의는 낙제점을 기록해야 되는 현실인 것일까요? 일단 우리에게 부여된 헤겔 강의라는 현상에 대해 분석을 시도해 봅시다. 강의를 행하는 주체는 강의의 기원이 됩니다. 자신만의 능력과 정열로 강의 내용을 준비하고, 정확하게 자신이 가져온 정보만을 말하게 됩니다. 머릿속에 적어온 것을 다 내뱉을 수 있다면 그의 강의는 성공한 것입니다. 반대로 수강생들은 제공되는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강의의 객체가 됩니다. 그에게는 주체에 의해 주어지는 내용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해야만 하는 선택의 가능성이 과제로 부여됩니다.
그런데 이로써 우리는 과연 객관적 사실로서 강의라는 현상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일까요? 강의의 주체와 객체가 분열되고, 독백이 난무하며,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로 얼룩진 강의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현실일까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동안만큼 현실은 우리에게 대단히 추상적으로 지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추상적 지각은 이후에 우리의 내부에서 반드시 갈등을 야기합니다. 우리에게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우리의 지각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추상적 지각은 지각의 주체와 대상을 역으로 소외시킵니다. 왜 그럴까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나에게 헤겔을 강의했던 교수의 언표는 결코 독백이 아닙니다. 그가 만약 빈 강의실에서 강의를 한다면, 그는 전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했을 것입니다. 텍스트를 쓰듯이 말이지요. 홀로 텍스트를 쓸 때조차도 그는 이후 그 글을 읽는 독자를 의식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독백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가 눈을 감고 있든 혹은 눈을 감은 듯이 보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전방과 좌우를 주시하고 있든 그는 분명 강의를 듣고 있는 청중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식이 이른바 그에게 그를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론적 지평을 열어줍니다. 그 의식이 그가 준비하지 않았던 언어를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장을 구사하게 하는 겁니다. ‘지금’ 그리고 ‘이곳’에서 그가 홀로 준비했을 기원을 넘어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던 새로운 현실이라는 맥락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신을 드러냅니다.
강의의 주체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강의를 듣는 청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도에 익숙해 있으며 직접적으로 전수되는 일률적이고 정답만을 요청하는, 단순한 정보에만 목말라하는 어두운 그림자를 지닌 학원세대들에게는 강의의 기원이 대단히 중요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더욱이 철학적 사색이 교차하는 이론수업은 강의자 중심인 단색적 환경으로 변하기 쉽고, 수강생들은 수동적인 자세로 던져지는 정보만을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고의 틀과 삶의 방식을 그들은 스스로에게 요구해야만 합니다. 일정한 사고의 패러다임과 관성의 법칙으로 굳어진 삶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그들 자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헤겔이라는 철학가를 이해하는데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에 몸담고 있다 보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비상한 인물들을 수없이 만납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을 이론적으로 복원해 내기란 대단히 어려운데, 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의 난해함과 사색의 복잡함에만 있지 않습니다.
정신의 왕자들이 걸었던 길을 우리가 동일하게 걸어갈 수 없는 정확한 이유는 그 길 자체가 그들이 세상과 만나는 존재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세상과 관계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자신만의 언어를 통해 표현해 낸 것이지요. 그들이 걸었던 길을 지각할 수 있는 통로를 우리는 그들과 관련된 참고문헌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습니다. 행여 찾았다 하더라도 그러한 만남은 피상적인 언저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찾은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문의 열쇠는 세상과 만나는 우리 자신만의 체험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맥락에서 그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강의라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수강생들이 스스로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존재론적 지평이 됩니다. 수강생들에게 객관적 현실이란 단순히 ‘있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체와 객체가 존재론적으로 분리된 추상적 현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만 현실은 단순히 ‘있음’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란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과의 만남을 통해 열리는 현실을 지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순간 객관적 현실이란 이제 ‘있어야 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잉여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의 존재는 분명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들에 순응하고 만족하며 시장의 조건에 자신을 맞추어 가도록 강요하는 폭력적 세계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곧 있는 그대로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 현실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삶 자체가 주체와 객체라는 인위적인 이분법을 넘어서 세상에 던져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 현실은 그 자체의 모습만으로도 충만한 의미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주관의 독단이나 기원을 통해 전제된 객관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의식을 통해 서로에게 걸쳐져 있는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나와 세계가 의미를 통해 얽혀 있는 관계의 그물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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