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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인격의 철학, 철학의 인격

7. 인격의 회복

by 지렛대 2023.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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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으로 가는 정거장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객관적 현실이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철학사는 그 현상의 이상’(以上)을 실재론이라 불렀고, 이하’(以下)를 종종 관념론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객관적 현실이란 우리의 의식적 현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통찰이 후설이 우리에게 남겨준 철학적 메시지입니다. 어떤 현상이 우리에게 하나의 대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그 현상의 의미가 우리의 정신적 활동과 마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자가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건물의 외부에는 아파트의 도장공사가 한창입니다. 30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작업에 열중하는 인부들의 모습은 나에게 적지 않은 놀라움을 야기합니다. 관련된 장비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구 밖을 탐사할 정도의 과학기술이 발달된 오늘날 여전히 저렇게 높은 고층 아파트를 사람들이 맨손으로 칠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안정장비도 철저해 보이지 않습니다. 인부들에게는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는지에 대한 상념이 마음 한구석을 내리 누르기도 합니다. 분배정의가 오늘날 우리들의 양심으로 굳어진 탓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격리되어 고찰될 때, 이미 어떠한 의미도 얻을 수 없다는 또 다른 예를 들어본 것입니다.

후설이 현상학적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이렇듯 의미와 관계하는 현상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현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문제의 사태는 각각 다른 의미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나와 너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각 자신의 시간과 공간에 의해 형성된 삶의 맥락, 즉 일시적으로 완결된 고유한 삶의 이야기가 대상과 관련을 맺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관점만을 고집하는 태도를 객관적 태도라고 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자칫 우리에게 의식된 것만이 실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의 세계만이 존재한다는 선험적 유아론을 정당화 하는 오류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후설은 이러한 비판에 종종 시달린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그의 철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우리의 시각 또한 관념론적 유아론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비상한 매력을 지닌 채 여전히 우리의 지적 풍토를 지배하는 기원에 대한 자연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현상학은 나와 세계가 함께 던져진 존재론적 관계의 단면을 묘사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의미의 세계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이 대상에게 걸쳐져 있고 대상이 우리의 의식에게 걸쳐져 있기 때문에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했던 지향성이라는 개념에 내포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후설의 현상학을 해명하는데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후설이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어디서 차용하였는지 계보학적으로 추적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후설이 전통 형이상학과의 결별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전통 형이상학이 존재자의 존재에 관한 근본학이라면, 후설의 현상학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본질이라는 이름하에 과거를 들추며 우리의 지금그리고 여기를 희생한다면, 그것은 결코 진리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식과 대상의 일치라는 전통적인 진리관이 의식과 대상의 겹쳐짐으로 넘어가는 통로가 생깁니다. 어떤 측면에서 후설의 현상학은 데카르트 이후 근대의 이성철학을 계승하고 있으며, 존재자의 세계를 절대정신의 현현으로 연역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흡수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지평이 바로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와 관련하여 인간의 의식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철학을 이해해 가는 통로입니다. 물론 의식이 중요하고 물질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의식을 강조하면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비난받는 현상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오해일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존재의 드러남이라는 어구를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 의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앞에 서 있는 건물을 보지 않는다면, ‘와 건물이 서로 걸쳐있는 단면이 결코 드러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바로 유아론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은 당연히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구심이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회의에 찬 눈초리도 사실은 일정한 사고의 틀에 얽매인 과민반응이기 때문입니다. 후설에 의해 제기된 현상에 관한 학은 우리의 의식이 어떤 식으로든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어떻게 우리에게 드러나는지를 이해하려는 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나의 의식이 먼저인지 아니면 세계가 먼저인지는 일차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증명될 수 없으며, 또한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기원을 찾으려는 집착에서 비롯된 시시포스의 도로에 불과합니다. 형이상학이나 그 맞은편에서 대안으로 부상하였던 실증주의는 공통적으로 존재자의 기원을 추구함으로써 걸쳐있음으로부터 연유하는 의미로서의 현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였습니다. 현상학은 이렇게 망각된 존재의 지평을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후설 현상학의 구조가 지니는 특징을 정식화할 수 없습니다. 그 작업은 매우 복잡하고 애매하기까지 합니다. 아울러 그것은 이 책의 과제도 아닙니다.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론적 세계에 대한 판단중지(epoche)를 행하고 현상학적 환원과 형상적 환원을 통해 일시적으로 괄호쳐 놓았던 현상의 본질에 도달코자 행하는 그의 사고의 여정은 단선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그렇듯 후설도 자신의 철학적 상상력을 교정하고 확장하며 스스로를 닫힌 체계로 인식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사고의 여정이 무르익어 마침내 지혜와 예지의 여신인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힘차게 날갯짓을 하였을 때, 그를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사고가 마지막 도달했던 지점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후기 철학의 대표작인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인간 이성의 회복을 주장합니다. 과학 기술문명에 의해 잊혀진 인간 주체성의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인격의 회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학문의 이념을 단순한 사실학으로 환원하는 실증주의를 매우 격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만일 학문들이 이 같은 방식으로 객관적으로 확정 가능한 것만을 참이라고 간주한다면, 만일 역사가 정신적 세계의 모든 형태 즉 그때그때 모든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구속하는 이상들, 규범들이 일시적 파도와 같이 형성되고 다시 소멸되는 것이며, 이것은 과거에도 항상 그러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따라서 이성은 무의미로 되고 선행은 재앙으로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뿐이라면, 세계와 그 속에 사는 인간의 현존은 진실로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그러한 사실에 위안을 느낄 수 있을까? 역사적 사건이 환상적 비약과 쓰라린 환멸의 끊임없는 연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세계에서 과연 우리는 살 수 있을까?”

 

어쩌면 현상학의 문제는 처음부터 인격의 문제였는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러운 사고의 태동과 그에 상응하는 이론세계의 발달은 전통과 종교 그리고 각종 이데올로기를 양산합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정치, 법률, 종교, 예술 등 사회적 의식의 형태로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 합니다. 교육은 이것을 근본적으로 가능케 하는 사회적 체계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획득해 갑니다. 그런데 자연적 사고에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 사고가 야기하는 역기능을 만만히 봐서는 안 됩니다. 정신적 구조물들의 홍수는 현실의 서사성, 즉 개별적 실존만이 써내려갈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삶의 이야기를 권력화된 이미지로 환원시켜 버린 것입니다. 우리에 의해 구성되어 사회적 구조물로 굳어진 의식체계들이 자유롭게 열려진 개별 실존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기원을 추구했던 실증주의는 확실히 형이상학이 만들었던 허구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를 대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체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 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왜곡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객관성이라는 이름하에 인간의 인격을 사물화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실증주적 사고가 불러온 사실의 세계는 개인을 일정한 가격으로 환산하는 현대의 자본주의적 생활양식과 맞물리며 찰떡궁합의 요리를 우리에게 선보입니다. 인간소외는 악덕 자본가들의 무차별적 이윤추구에서 야기된 우연의 부산물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경제체제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다리입니다. 그 사다리를 딛고 오르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 지성의 역사만큼이나 필연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필연의 세계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근거를 부정하도록 가르칠 거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그것은 이성의 위기, 곧 인격의 위기를 불러 온 것입니다.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이 질문만큼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인격이 사물화 되는 과정은 곧 존재의 위기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나를 특징짓고 있는 존재의 생기를 근본적으로 지워버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지각은 나와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맞닿아 있음을 삶에서 증명할 수 있는 인간적 자유로부터 유래합니다. 화석화된 나로부터 벗어나 세상과 더불어 있음을 우리가 망각할 때, 존재의 세계도 레테의 강을 건너갑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의 실존을 대상화시키는 모든 시도는 존재를 은폐하고 망각시키는 역사의 스캔들이었던 것입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현실

 

 

 

환상적인 이야기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그려내었던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아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동화작가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의 작품성냥팔이 소녀는 어린 시절 나를 존재의 세계로 일깨워 내었던 언어적 선율이었습니다. 나의 존재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말입니다.

특이한 점은 동화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안데르센이 손에 쥔 필기도구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 넣는 밝은 색조의 파스텔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결코 밝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가난한 소녀, 아버지의 죽음, 비천하고 못생긴 오리새끼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동화의 주역들입니다. 그의 시선은 늘 낮고 어두운 곳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어두웠던 성장배경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러한 그의 삶의 이력이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의 존재를 풍요롭게 한다는 점입니다. 희망과 기쁨이 아닌 차오르는 슬픔을 통해서 말입니다. 작품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 봅시다.

이 작품은 몹시도 추운 한겨울, 굶주린 채 눈 위를 맨발로 걸어 다니며 성냥을 파는 한 소녀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한 장면 한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추운 거리를 한 굶주린 성냥팔이 소녀가 모자도 없이 맨발로 걷고 있습니다. 성냥은 한 갑도 팔지 못하고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가엾은 소녀는 건물 벽에 기대어 주저앉고는 얼어붙은 손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성냥 한 개비를 피웁니다. 빨갛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온갖 환상이 그녀를 스쳐갑니다. 첫 번째 성냥은 큰 난로가 되고, 이어서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 그리고 예쁜 크리스마스트리가 나타나는데, 그것에 달린 불빛은 높은 하늘로 올라가 밝은 별이 됩니다. 그 불빛 속에 할머니가 나타나자 소녀는 그 행복한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소녀는 할머니를 계속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 남은 성냥을 몽땅 피워 버립니다. 그러자 사방이 밝아지며 이윽고 소녀는 할머니에게 안긴 채 하늘 높이 춤을 추며 올라갑니다. 추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소녀는 미소를 띤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을 보았는지, 어떻게 축복을 받으며 할머니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였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아이들에게 존재의 풍요로움을 가르쳐 주는 수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후한 평가는 모종의 철학적 정당화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한 소녀의 죽음으로부터 자연 세계를 넘어서 어떠한 존재의 세계를 불러올 수 있을까요? 첫째는 그녀의 죽음이 지니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다소 안타까운 결말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그녀의 비극적 죽음은 우리에게 지극히 익숙한 현상입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자연의 세계에서 약한 동물의 희생이 대 자연의 섭리이듯, 인간 사회에서의 죽음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것이 전부라면 주인공을 죽임으로써, 불우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는 작가의 가학적 취향만이 이 작품 속에 메아리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소녀의 죽음을 통해 존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넓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둡게만 묘사되었던 소녀의 죽음을 보며 우리는 무심히 지나쳤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 현실에 집착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을 동반하면서 말입니다. 생존을 위한 자기 보존본능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지각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우리는 인간적 따뜻함과 차가움이 존재와 연관된 삶의 지각임을 깨닫게 됩니다. 배고픔과 풍요로움, 차가움과 따뜻함 그리고 가까운 것과 먼 것이란 나와 타인이 존재론적으로 걸쳐있을 때 교차하는 존재의 드러남이라는 사실도 직접적인 경험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둘째는 무엇이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입니다. 앞서 고찰하였듯, 후설은 선험적 선회를 통해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형이상학적 사물중심에서 의식 내재적 세계로 눈을 돌립니다. 이는 자칫 고전적 의미의 관념론으로 빠져 들어가는 위험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칭 실재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좁혀지고 화석화돼버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더욱 풍요롭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소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성냥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냥이란 작은 나뭇개비의 한쪽 끝에 황 따위의 연소성 물질을 입혀 만든 보잘것없는 물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서 당겨진 자그마한 불꽃은 때론 따뜻한 난로가 되었고, 때론 맛있는 음식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성냥을 통해서 소녀는 그토록 그리던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하늘의 문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에게 성냥은 소망과 희망의 원천이었던 것이지요. 소녀의 마음을 읽으며, 우리는 오히려 실증학문이 만들어내는 실재의 세계가 얼마나 편협한 관념의 다발에 불과한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회화 과정을 사회적 정체성을 획득해 가는 통로이자 세상과 더 가까워지는 과정으로 간주 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이는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가는 계몽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성숙함을 위한 진보란 초자연적 환상의 지배로부터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키고 모든 비과학적 생활태도에 저항할 수 있는 지적인 자유와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몽의 정신이 존재의 드러남을 은폐시키는 최대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 우주를 하나의 단순불변의 수학적 법칙들에 의해 설명하는 기본적 패러다임은 인간의 존재를 동반하는 기쁨과 슬픔, 차가움과 따뜻함, 빈곤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삶과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확신하는 낙관주의는 그것이 화석화된 실재에 사로잡혀 있는 한, 여전히 사회화와 계몽이 필요한 어린 아이들의 상상력 보다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에 자신을 맡긴 어른들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숱한 고유한 이야기들을 미학적으로 풀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어떤 관점에서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와 사물의 일치만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우리의 언어는 상상의 나래를 통해 세계를 훨씬 더 풍요롭게 그려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정신에 내재된 존재론적 비밀입니다.

사회화 과정은 종종 고정된 이론을 주입시키고, 정해진 틀을 통해 사물을 고찰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나와 세계의 겹쳐짐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풍요로움을 폭력적으로 억압합니다. 자연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무미건조한 정의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상상력의 억압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추상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과학적 근거와 기원을 찾으며 현실을 추상하는 과정이란 존재가 나에게 다가오는 통로를 가로막는 폭력인 것입니다. 감동도 설렘도 그리고 희망도 우리는 정해진 방식으로 설명하며 일정한 틀 속에서 느낄 뿐입니다. 존재의 생기를 고정관념 속에 가둬 버리는 것이지요.

현상학은 우리가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접근해 갈 수 있는지 일종의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달리 말하면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이 서로 겹쳐져서 만들어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어떻게 열려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 한 것이지요. 그것은 실증적 분석과 형이상학적 본질추구로 인해 망각으로 묻혀 버린 그 무엇을 기억해 내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은 우리에게 자연적 지각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이르는 상상력

 

우리는 어떤 것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 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희망하지 않으면서 희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잃어버리거나 얻지 못함이 없이 아쉬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이러한 정신의 특성을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감성, 신념, 희망 등은 우리가 자연적 본능을 벗어나 인격적 삶을 함께 꿈꿀 수 있는 지평이며, 이 지평을 열어주는 열쇠가 바로 지향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이 지향하는 대상이 반드시 실재하지는 않다는 사실이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근거도 없이 형성된 각종 신화에 열광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쉽게 믿으며, 부모가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감정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자식들은 부모가 역경에 처한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며 별이 되어 절망한 사람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된다는 속설은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정신적 유혹입니다.

철학사에 등장했던 인식론은 인간 정신의 지향적 성격으로부터 펼쳐지는 광활한 영역에 당황스런 눈초리를 보냅니다. 인식론의 과제란 언제나 우리의 정신이 어떻게 세계의 자연적 대상들과 일치하는지를 연구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식의 지향적 구조를 밝히기 위해 목을 매는 숱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식과 대상의 일치를 한 점의 의혹도 없이 해명한 철학이 등장하지 못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의식의 지향적 구조가 근본적으로 열려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의식의 지향성이 항상 인간의 상상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이 철학사에서 단일한 주제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그전까지 상상력은 단순히 지각과 이성사이를 매개하는 정신적인 기능정도로 이해되었지요. 그럼에도 상상력이 현실을 외면하거나 단순히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는 불필요한 여분으로 간주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상상력이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창조적인 원천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예컨대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유한성과 무한성을 매개하는 중간지대로서, 예술분야에서는 우리의 기억, 표상, 사유로부터 어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근대는 실로 다양한 사유실험이 진행되던 시기입니다.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달이 경험적 데이터들을 서로 결합 내지는 분리하고 다양한 방법론을 적용하여 현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추출해 냈듯이, 철학도 기존의 고정된 사고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고의 조합을 넘어서 사고 자체의 가능조건을 묻는 시도가 함께 병행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동일한 정신적 대상을 두고 서로 상반된 표상들이 가능했던 근본 이유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철학사는 실로 다양한 관점의 차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의 보고(寶庫)인 셈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 단일한 철학적 주제로 등장하게 된 것도 아마 다양한 사유실험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자신의 시대와 맞물려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지각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진행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정신의 힘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겁니다. 이렇게 하여 상상력은 정신적 기교라는 기존의 부차적인 기능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지각할 수 있는 정신의 힘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상상력이 지각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인간의 의식과 대상이 서로 맞물리며 펼쳐내는 지평의 확대이자 존재의 풍요로움으로 지각되는 겁니다.

한 마리 제비가 왔다고 봄이 온 것은 분명 아닙니다. 상상력을 지각과 이성 사이에 놓여 있는 판타지로 간주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제비 한 마리를 봄의 도래로 확신하기에는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신중함이 겨울 내내 배고픔과 추위에 떨며 봄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한 마리의 제비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의 선물까지 빼앗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제비의 출현이 봄이 가져다줄 수 있는 희망과 소망을 의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담쟁이덩굴에 붙어 있는 마지막 잎사귀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던 한 소녀와 일생을 통틀어 최고의 걸작을 남겼던 무명화가의 마음이 만나서 우리의 삶에 알 수 없는 균열을 일으키는 이유는 그들의 상상력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풍요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흄과 칸트의 예를 통해 상상력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앞서 우리가 언급한 바 있는 흄은 전형적인 경험론자입니다. 경험론에 대한 확신이 도가 지나쳐 그를 실재에 대한 회의(懷疑)로 까지 이끌게 됩니다. 거의 체념에 가까운 실재에 대한 그의 회의는 인식론과 존재론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전형적인 근대정신의 반영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의 의식과 대상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흄의 사유를 움직였던 전부였습니다. 데카르트가 그랬듯, 흄 또한 인식의 가장 확실한 토대를 추구합니다. 데카르트의 회의가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자의식을 얻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면, 이제 흄은 그 자의식까지도 감각을 통한 이미지로 해체시켜 버립니다. 우리가 일정한 대상을 바라볼 때, 경험하는 성질들에 대한 인상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흄에 따르면, 다양한 인상들의 조합이 양적 혹은 질적으로 축적되며, 우리에게 익숙한 자아관념이 탄생합니다. 문제는 어떠한 인상의 조합도 일정한 대상이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실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인격의 동일성과 관련된 그의 논점은 쉽게 반박될 수 없는 경험주의적 사유의 정점입니다.

 

어떤 철학자들이 상사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매순간마다 이른바 우리 자아를 내면적으로 의식하고 있으며, 자아의 존재와 자아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등을 느끼고, 자아의 완전한 동일성과 단순성은 모두 논증의 명증성 이상으로 확실하다고 한다. [] 불행히도 이 모든 긍정적 주장들은 그 주장들을 옹호하는 실제 경험과 상반되며, 여기서 설명된 방식으로 우리는 자아의 관념을 가질 수 없다. [] 어떤 인상이 자아의 관념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 삶의 전과정을 통해서 그 인상은 불변적으로 동일함을 지속해야 한다. 자아는 그와 같은 방식에 따라 존재한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상은 없다. [] 그러므로 이 인상들 가운데 어떤 것에서, 또는 다른 어떤 것에서 자아의 관념이 유래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와 같은 관념은 없다.”

 

우리의 인식은 감각적 경험이 가져다 준 지각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 대상과 지각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러한 흄의 결론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동의는 우리가 흄의 출발지점을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공유할 경우에 한해서 유효합니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자의식으로부터 출발할 경우, 우리가 데카르트의 회의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누군가가 이들의 정신적 방황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존재론적 지평을 열고자 한다면, 그는 양자가 공통적으로 출발하고 있는 지점을 확인하고, 그곳이 우리가 딛고 서 있을 만큼 견고한 지반이 아님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또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뜻 서로 대립되는 경향으로 비춰지는 데카르트와 흄의 회의는 나와 사물을 존재론적으로 분리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결함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식론적인 분리를 존재론적 분리와 혼동한 것입니다. 이 혼동이 흄으로 하여금 삶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멀어지게 합니다. 물론 흄도 이 부분에서 망설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저서에는 고민한 흔적들이 역력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지각하려는 꿈은 흄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철학의 주된 과제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흄은 자신을 자신으로 만들어 주었던 학문적 테두리에서 한발작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흄 역시 가장 일반적인 대상적 인식 혹은 자기 정체성과 같은 실존적 자의식이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감각인상들을 넘어서 어떻게 자신만의 독립성과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밝히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그의 학문적 고집은 더욱 완고해 집니다. 우리는 내 앞에 서 있는 타자가 내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릴 때조차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가 앉아 있는 의자와 손을 얹고 있는 책상의 존재는 어떻게 지속성을 확보하는 것일까요?

흄은 모든 관념이 그에 상응하는 감각인상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공리로부터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나와 타자의 실존이 지니는 필연성은 유지될 수 없는 환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론적 명확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존 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은 그로 하여금 관념의 지속성과 대상의 실재성을 어떤 식으로든 설명하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간 속에서 지각하는 고유성이라는 개념의 비밀은 또한 어떻게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때 흄의 고민을 덜어주는 열쇠가 바로 상상력입니다. 흄은 증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지각 안으로 자연스럽게 밀고 들어오는 실체관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과정을 추적합니다. 여기서 의식의 능동적 기능이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흄에게 있어서 지각 경험들에 의해 형성된 관념들은 대상에 대한 수동적인 지각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관념이나 개념들은 인식주체가 다양한 감각인상들을 능동적으로 조직하고 질서지운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개별적인 감각인상으로부터 일정한 관념과 개념들이 발생하고, 이것이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적 관습과 규범을 통해 일정한 실체로 굳어지면, 또한 그에 상응하는 이름이 부여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과정을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주관하는 정신의 능력이 이른바 상상력이 되는 것입니다.

자아나 실체에 대한 관념이나 개념들이 단순히 인간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라는 흄의 주장은 긍정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부정적인 것일까요? 흄의 인식론적 결말이 실재의 세계로부터 우리가 시선을 떼어내는 것으로 끝날지라도, 이것을 그의 철학적 사유의 목표점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정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세상과 만나며 이로부터 파생되는 인식은 오류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실체에 대한 독단이나 편견을 항상 돌아봐야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솔직한 고백을 통해서 말입니다.

흄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단순히 순수한 정신작용으로 간주되었던 상상력은 칸트를 통해 존재론적 지위를 얻기 시작합니다. 상상력이 현실의 한 부분으로 인정되는 첫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조금은 위험할 수도 있겠습니다. 칸트의 철학사적 위치란 경험론과 합리론이라는 두 거대 왕국을 통일시킨 가장 강력한 인식론의 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존재론적 행보를 강조하는 이유는 칸트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져 있는지를 고심했던 최초의 철학가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인식론이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고 양자의 일치여부를 외적으로 탐구했다면, 칸트는 현실의 단면을 주체와 객체의 겹쳐짐 속에서 파악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인식주체와 대상으로 경계 지어진 퍼즐이 아니라, 내적으로 연결된 관계의 앙상블이라는 것입니다.

칸트에 있어서 상상력이란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경계가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인식론의 석양에 위치해 있습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흐릿한 비포장 시골길을 따라가듯, 그는 상상력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경험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영역으로 열어 보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현실이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서 열린다는 언급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에 비춰본다면 거의 신성모독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눈을 돌려 지금 우리에게 펼쳐지는 현실을 직시해 본다면 사태가 매우 달라집니다.

우리는 오늘날 과학 기술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힘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살아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합니다. 대표적인 이유는 단순히 인과법칙으로 굳어진 합리적 지식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간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화석화된 실체에 고정시키고 그 위에 의식을 덧씌웠습니다. 그 과정은 현실을 끊임없이 경계 지우고 조각내는 과정이었던 것이지요. 이 경계를 허물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이른바 과학의 힘입니다.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라는 공학의 발달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물학적 말초신경을 자극해서가 아닙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열어놓은 현실이 우리의 삶을 살아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별 영역들에 몸과 마음이 고정되어 추상화된 일상에서 답답해하던 개인들에게 경계를 무너뜨리며 탈 영역화의 세계를 보여주는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는 생명현상의 전형으로 지각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조각내고 있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힘에 우리 모두가 환호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와 함께 열린 새로운 현실은 상상력에 의해 덧씌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라고 봐야 옳을 것 같습니다. 상상력은 화석화된 현실을 뛰어넘어 우리의 현실을 지속적으로 풍요로운 삶으로 이동시켰던 것입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움으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상상력은 또 다시 개별영역들의 경계를 허물어 창조적 융합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가 경험적 종합을 통해 지각대상을 인식하고 초월적 종합을 통해 대상의 실체성에 도달하게 되는 중심에 상상력이 놓여있다고 주장하는 칸트의 선험철학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함께 열려질 수 있다는 존재론적 통찰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더욱더 풍요롭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잠시 칸트의 비판철학의 서곡을 장식하는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으로 들어가 봅시다.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의 인식은 감각적 경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경험주의자들의 통찰은 칸트에게도 여전히 부정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표상들만으로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칸트의 전략은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전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경험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인식이란 무엇일까요?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감관에 의해 지각되는 대상에 대한 다양한 표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식의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이란 다양한 감각인상들이 통일적으로 결합되어 일정한 질서에 의해 닫혀진 대상적 앎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KrV, A 97) 인식이란 직관의 다양성에 종합적 통일이 가해졌을 때 비로소 발생한다는 것입니다.(KrV, A 105) 우리가 코끼리를 인식하는 과정을 예로 들어 봅시다. 기다란 코, 굻은 다리, 거대한 몸짓, 웅장한 울음소리, 거친 피부, 짧은 꼬리 등 우리의 감관은 코끼리에 대한 다양한 표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표상들을 종합하여 코끼리라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얻게 됩니다. 문제는 개별적인 표상들의 기계적 조합이 직접적으로 코끼리라는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인식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대상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의식의 힘, 이른바 상상력에 있는 것일까요? 감각적 데이터들의 종합과 통일의 근거가 대상에 있다면, 인식의 근거는 대상이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일 것입니다. 반면 의식에 있다면, 우리는 객관적 세계의 가능근거를 의식의 구조에서 찾아야 될 것입니다.

칸트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물론 이것이 직접적으로 객관적 세계의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는 인간의 상상력에 숨겨져 있는 존재론적인 비밀을 강조하는 듯 보입니다. 세계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란 다양성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인식되는 방식은 단일성입니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감각적 지각을 인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역도 역시 성립합니다. 세계가 자신을 다양성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단일한 방식으로 인식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의 다양성은 무한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며 하마나 코뿔소로 오해할 때조차도 이 과정은 필연적입니다. 인간의 인식은 일정한 테두리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철학사에 등장하는 선험철학의 핵심부를 이해하게 됩니다. 칸트는 객관적 경험의 세계가 가능할 수 있는 조건으로 인식주체의 선험적 형식을 거론합니다. 대상의 다양한 감각인상들에게 일정한 규칙성을 가능케 하는 필연적 통일의 근거란 의식의 통일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의 궁극적 근거로서의 의식을 칸트는 통각(Apperception)이라 부르는데,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이란 바로 통각의 원리에 따른 순수 종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후설의 현상학도 칸트에 의해 회복된 상상력의 존재론적 지위를 토대로 자신의 상상력을 쌓아 올립니다. 대상의 실재성 혹은 보편적 본질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의식주관의 비약이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이론적 세계와 자연적 입장을 괄호치고, 본질 직관을 거쳐 초월적 주관성에 이르는 의식의 단계들은 판단 중지와 현상학적 환원, 형상적 환원, 초월적 환원이라는 정신적 비약을 거칩니다.

후설에 있어서 상상력은 대상에 대한 주어진 표상들을 자유롭게 결합하여 그것에 대한 형상적 직관으로 이끌어 갑니다. 존재의 비약, 즉 타성적인 일상, 경직된 이론으로부터 튕겨져 던져진 곳이 후설이 말한 사태 그 자체로서의 현실인 것이지요. 존재의 세계를 기억해 낸다는 것은 점진적으로 서서히 색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문득 갑자기 허물을 벗은 것처럼 자신의 모습이 변환되는 것입니다. 그 종착점인 초월적 주관성의 자리에는 대상으로 전락될 수 없는 인격적 정체성이 놓여 있습니다. 생물학적 기원이나 형이상학의 본질을 넘어서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자리, 마지막까지 열려져 있는 존재의 자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위를 걷는 다는 것

 

기원을 추구하는 생물학적 인간관이 밝혀낸 인간적 삶의 모습은 우성인자를 남기고자 하는 욕구와 열망입니다. 이러한 자연적 욕구는 실은 생물학자들이 밝혀낸 새로운 사실이 아닙니다. 굳이 자연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자기보존 본능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삶은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너무나 밀착되어 그것을 이해하기가 전혀 어렵지 않다는 말입니다. 정치가 힘의 논리를 가르치며, 경제가 자본의 논리를 강요하는 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삶이 생태계의 연장이라는 주장을 낯설게 지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인간관이란 인간의식의 진화된 결과이자 우리들의 자연적인 모습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굳이 딴죽을 걸지 않습니다.

그럼 자기보존 본능과 양육강식이라는 자연적 모습이 우리에게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일까요? 생물학적 인간관은 여기서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답습합니다. 사실과 정당화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인간적 삶의 정당화는 생물학적 기원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만들어 내었던 자연과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 자연적인 것을 이미 넘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넘어섬을 근거로 새로운 자연의 세계를 다시 창조합니다. 현상학적 운동은 그 세계를 의미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앞서 하이데거가 존재의 세계를 불러오는 과정도 이러한 맥락을 통해 고찰한 바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다는 것!”

 

다분히 종교적 색채를 지닌 용어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은 공통적인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일 겁니다. 과학은 중력과 부력의 역학관계에 따라 일정한 물체가 물에 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여기에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이용하여 우리는 수영의 원리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이 물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연적인 법칙에서 우리는 어느 누구도 물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물위를 걷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기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인식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 원인과 결과라는 실증학문에 익숙한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란 우리의 인식을 벗어나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그것의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집트로부터 자신의 민족을 이끌고 새로이 정착할 곳을 찾아가던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행하고 이집트의 추격을 뿌리치는 장면은 유명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그 사건은 신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행여 실제로 일어난 사실로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오늘날 일련의 과학자들은 그 사건을 기적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기적은 바람에 의한 것으로 유체역학의 원리를 통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시속 100이상의 강풍이 12시간 이상 지속되면 바닷물의 수위를 약 2m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면서, 모세의 기적으로 알려진 현상은 이 같은 바닷물의 수위 변화에 따른 일시적 현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조금은 색다른 해석에 도전해 보고자 합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기적은 종교적인 초월의 영역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한가운데서 살아간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 기적인지도 모릅니다. 실존이란 매일 매일 물위를 걷고 있는 존재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물 위를 걷는다는 표현은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펼쳐지는 삶 자체를 이미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세상에 던져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개별적 실존에게 던져지는 단 하나의 물음만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일 것입니다. 존재의 드러남은 나의 실존이 타인보다 풍요로운 사회적 부를 누리고 남다른 지위를 얻는 것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광활한 우주와 무한한 시간 속에 개인의 유한한 실존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 티끌에 약간의 무게를 더하고 색을 칠한다 한들 돌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존재가 드러난다는 말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행여 그것이 드러난다 한들 얼마만큼의 무게감을 보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기적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개별 실존이 자신을 의미체로 간주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것은 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첫 걸음은 자신을 목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존재의 힘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은 이미 완성된 실현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태라는 사실의 지각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존재론적 지평입니다.

인간에 의해 인식의 법칙으로 굳어진 자연의 원리는 목적으로서의 인간실존의 가능성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 인간과 생명의 기원을 밝히는 과정은 대단히 분석적입니다. 뉴턴이 물질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기본법칙으로 만유인력을 제시한 이후, 학문적 혹은 과학적 방법이란 가장 단순한 원리로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비상한 관심을 끌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기원을 밝히려는 과학의 시도도 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생명체의 최소 단위인 세포가 인간과 생명의 기원으로 간주됩니다. 일단 생명의 기원이 밝혀지고 나면, 자연스럽게 세포가 생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인 DNA, 대사기능, 세포막 등이 분석의 주된 대상으로 각광을 받게 됩니다. 분석을 추동하는 목적은 한가지일 것입니다. 생명체를 조작, 복제 내지는 창조할 수 있다는 기대치의 상승이 그것입니다.

과학이 인간의 기원을 분석적으로 처리하는 동안, 개인의 실존은 사물화 과정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가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는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과학은 인간적 가치라는 정신적 과제를 사회과학의 문제로 떠넘깁니다.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법칙은 과학이 발견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물질의 세계가 기본적인 몇 가지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방법론적 단순화는 인간과 사회의 구조, 정신의 가치 또한 몇 가지 기본법칙에 따라 질서화될 수 있다는 심리적 경향까지 주도하게 됩니다.

우리의 생활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마법과도 같은 세계, 이른바 자본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자본의 질서는 실존을 특징짓는 인격을 존재와 목적의 세계에서 완전히 추방합니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는 자본이 정해준 질서에 따라 일정한 가격을 지닌 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각자에게 매겨진 가격을 높이기 위해 애쓰는 것은 아마도 우리시대가 인정하고 있는 유일한 가능태의 모습입니다. 인격체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부품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격은 그리 쉽게 가격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실존적 죽음은 가격의 세계에서는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의 죽음입니다. 그 존재의 죽음에 대항하는 것이 목적과 의미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의 저항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물위를 걷는 다는 것은 분명 기적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물위를 걷는 것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의미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실존의 목소리를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물질계의 삶과 정신계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단순한 기본법칙들에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내부의 목소리를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에 거스르는 삶을 영위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정당하지도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증주의적 사고가 지니고 있는 오만과 편견입니다.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변을 배격하고 관찰이나 실험 등으로 검증 가능한 지식만을 인정하려는 인식론적 태도는 자연의 한 단면에 불과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인간적 삶의 전형으로 변형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저항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입니다. 오늘날 자본의 논리에 저항하는 삶을 사는 것은 불행한 의식의 출발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삶을 지속해 갈 수 없으며,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중요한 지각이 발생합니다. 그 지각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지각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정열을 불러일으키고 존재를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그 지각이 과학의 시대인 오늘날까지도 종교적 상상력을 유지시키는 가장 강력한 원천이 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길이 80km, 40km의 사막을 무대로 펼쳐진 악마에 의한 예수의 시험이 이 지각을 이해하는데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악마와 그에 의한 예수의 시험은 모세의 기적처럼 일종의 신화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화는 단순한 허구와는 다릅니다. 허구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라면, 신화는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현실을 풍요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예수의 시험 또한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화인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지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내용의 이해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가 사막에서 40일간에 걸친 금식수행을 마친 즈음 악마가 나타나서 그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며 시험을 합니다. 악마가 던진 시험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둘러싸고 진행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먹을 것에 관한 것입니다. 악마는 굶주림에 지쳐 인간적 한계에 다다른 예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해 기독교의 역사에 길이 남는 명언을 남깁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언뜻 이 답변은 예수의 종교적 신념을 대변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간의 의구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왜 예수는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았을까요? 공생애(公生涯)기간 동안 예수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충분히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듯 보입니다. 심지어 그는 악마를 쫒아내는 기적까지도 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악마의 코를 납작하게 하지 않고 굉장히 어려운 길을 돌아갑니다. 악마가 자신을 더 시험할 수 있도록 빌미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의 답변에서 단순히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는 현실에 대한 탁월한 지각을 발견합니다. 예수의 답변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존재의 균열을 일으킨 이유는 그가 신진대사(metabolism), 즉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 법칙을 넘어섰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이미 문화적 삶이라는 존재적 사건을 통해 신진대사 이상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처했던 상황과 그의 대응방식에 있습니다. 사람은 떡이 없이는 결코 살지 못합니다. 모든 생물은 주위 환경으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흡수하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합성하기도 하며 또는 물질을 분해하면서 그로부터 생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습니다. 우리도 예수도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법칙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생명체로서 인간존재가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중심입니다.

예수가 신적인 능력의 소유자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를 신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애써 포장하는 것은 그의 삶이 지니는 존재론적 의의를 상당부분 훼손합니다. 예수 스스로도 그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도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악마는 예수를 시험할 수 있었습니다.

40일이라는 시간은 인간적 한계를 상징하는 시간입니다. 40일간의 금식을 거치며 예수는 아마도 자신의 생물학적 소멸이 임박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살아남기 위해 떡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행여 우리가 노력을 한다면, 악마도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악마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예수는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이미 그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것입니다. 그가 살기를 원했다면, 악마의 요구에 따라 그는 떡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가 물질계와 정신계를 지배하는 기본법칙을 알고 그에 입각하여 살아남고자 했다면, 그는 떡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어야 됩니다. 만약 그랬다면, 악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는 악마의 기대에 반하는 선택을 하였고, 그 선택이 우리의 존재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생물학적인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가장 인간적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에 작지 않은 균열을 일으키는 겁니다. 죽음을 선택하여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첫 번째의 삶이 신진대사에 입각한 생물학적인 삶이라면, 두 번째의 삶은 기적입니다. 그는 신진대사의 법칙을 넘어서는 자신의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인격적 정체성을 세운 것입니다. 인격적 정체성이 불러오는 의미의 세계는 아무런 목적 없이 냉혹하게만 흘러가는 자연의 세계를 정확하게 대체합니다.

결코 수단화될 수 없고, 대체될 수 없는 인격의 모습이란 인간적 한계에서 자신의 전체적 모습을 드러냅니다. 생물학적 한계를 느낀다는 것, 좌절을 안다는 것, 그럼에도 자신의 전부를 팔아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얻는 행위는 의미의 세계가 발생하는 존재론적 지평입니다. 의미의 세계란 개별 실존이 세계와 온몸으로 만나며 발생하는 기적입니다. 그 기이 수단과 부품으로 전락하여 삶의 윤기를 잃고 힘이 빠져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를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일깨워 냅니다. 그 기적이 우리에게 감동과 감격 그리고 열정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풍요로움 속에서 우리는 인격과 존엄성을 논할 수 있는 지평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악마가 예수에게 던진 두 번째 시험문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또 한 번 확인시켜 줍니다. 굶주림으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예수에게 악마는 다시 묻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예수의 답변은 더욱 걸작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여기서 예수는 첫 번째 질문보다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합니다. 가장 쉬운 길은 누구나가 선택하는 길입니다. 첫 번째 시험처럼 아마도 예수가 악마의 요구를 들어주는 경우일 겁니다. 행여 예수가 천사의 도움을 기대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기독교의 역사가 매우 달라졌을 겁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우매한 질문입니다. 역사학이 만약이라는 질문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던 이유를 돌아보면 비교적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는 뛰어내리지 않았습니다. 절벽 아래로의 추락이란 생물학적인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는 정확하게 안 것입니다. 악마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를 시험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악마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예수가 그가 원하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훌륭한 답변을 한 것이 아니라, 악마의 질문을 거부한 것이 포인트입니다. 떡을 만들기 보다는 삶의 의미를 선택하였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초자연적 기적을 행하기보다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비인격적 처사에 분노하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두 번째 답변은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위한 사회복지를 존재론적으로 정당화 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해 주기도 합니다. 사회복지란 인간 존엄성을 기본가치로 하는 사회적 행위로서 사회구성원이 자력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때 최소한의 의··주를 해결해 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이것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실천적 행위는 이른바 시험하지 말 것이라는 예수의 선언과 존재론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의무로 주어져야만 합니다. 왜 의무인 것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존엄할지라도 빵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이성을 통해 무한과 초월의 세계를 향해 나래를 펼 때조차도 우리는 끝이 뾰족한 아주 작은 흉기에도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의 이러한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생물학적 한계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존엄성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가 사회복지라는 용어를 의무로 규정한 이유는 자신과 자신의 존엄성이 생물학적인 한계로 인해 시험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물과는 달리 자신과 관계를 통해 자신을 만들어가는 개별 실존들에게 타의로 자신의 인격을 내려놓는 것은 실존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자연을 넘어서 물위를 걸어가는 기적과도 같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또 다른 자연을 만들어가는 동안, 우리의 매일 매일은 물위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때로 문학은 우리의 매일의 삶이 어떻게 의미를 발생시키는 기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탁월한 언어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오만과 편견

 

오만과 편견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고전작가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의 작품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의 정치, 경제상을 반영한 이 작품은 필름으로도 여러 번 리메이크가 되어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회적 규범과 고정관념을 통해 형성된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고 남녀 주인공들이 진정한 사랑을 찾아간다는 내용입니다. 작가는 주인공들의 의식구조를 통해 당시 사회상을 비판하는 이중적 효과도 거두고 있습니다. 한 귀족 출신의 남성과 중산층 출신의 여성이 엮어내는 사랑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말입니다. 잠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귀족 출신의 남성은 당시에 통용되던 전형적인 계급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그의 오만은 오늘날 생물학적 인간관의 그것과 다양한 측면에서 비견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가진 자의 선택이라는 통념과 이론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고정관념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의 인식이 자발적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손바닥 뒤집듯 그리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의 인식은 사랑이 그를 습격하면서 급격하게 혼란을 겪습니다.

잠시 논점에서 외출을 시도해 보자면, 우리에게 펼쳐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개별 실존의 관계도 늘 이런 식으로 전개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인간의 실존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통찰은 단순히 인식론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개별 실존이 자신의 삶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선택하듯,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개별 실존의 삶을 엄습한 것입니다.

어쨌든 남자 주인공은 그동안 자신을 지켜왔던 사회적 통념과 불현듯 자신을 삼켜버린 사랑 사이에서 심각한 내적인 갈등을 겪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의 정신적 고민이 단순한 인식의 갈등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지니고 있었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인식은 귀족가문들 사이의 경제적인 교환 행위나, 생물학자들이 지적하듯, 우성인자를 남기고자 하는 자연적 욕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물학적 중심이자 그의 생각이 미치는 테두리였던 것입니다. 다른 귀족과 경쟁하여 집안의 내력을 유지하려면 최소한 자신과 동등한 정도의 유력한 집안의 여자와 맺어져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생물학자의 통찰이 아니라, 가장 자연적인 생존법칙인지도 모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귀족들에게 있어 결혼이란 어디까지나 집안과 집안의 문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결혼이 개인의 진정한 사랑과 자유로운 선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인류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상호가 아닙니다. 지극히 현대적인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말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랑과 결혼이 지니는 내적 연관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소한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가 지적하고 있는 결혼의 자본주의적 허구성부터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가부장적인 일부일처제는 남성에 대한 경제적 종속과 성적 종속을 제도화한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상당부분 타당합니다. 이것이 남성의 사적 소유권을 토대로 부계중심의 혈연제도와 가족구조를 성립시킨 것입니다.

어쨌든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은 사랑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사로잡힘 앞에서 그동안 그의 정신세계를 가득 채웠던 다양한 사회적 통념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이른바 그의 눈에 콩깍지가 씌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오만은 여전히 자신의 실존적 결단을 가로막는 최대의 멍에가 됩니다. 그는 상대 여성에게 청혼을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의 청혼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같은 귀족을 만나 신분상승을 꾀하는 것이야말로 낮은 사회적 지위의 소유자가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의 자세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의 자연적 기대는 상대 여성이 그의 청혼을 단번에 거절함으로써 보기 좋게 무너집니다.

물론 상대여성도 주관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양미를 중요시하고 수동적이면서 고전적인 여성성을 강조하는 시대적 흐름과는 상당한 거부감을 지녔던 그녀는 사랑에 대해 대단한 환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가 보기를 원했던 것은 사회적 가면이 아니라 인간적 모습 자체였습니다. 사회적 배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성을 추구했던 것이지요. 이런 그녀에게도 상대방의 진심을 읽어내기에는 주관적 독단의 벽이 높기만 합니다. 그녀에게 비춰진 상대 남성의 모습은 전형적인 귀족의 오만함과 무례함 그리고 계급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속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가 보여주는 모든 모습들이 그가 입고 있는 사회적 가면의 연출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작품에 대한 간단한 줄거리입니다. 결론은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결국 그들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리며, 둘은 자신들을 옭아맸던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껏 우리가 작품의 내용을 상세히 언급한 이유는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중요한 존재론적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신이 꿈꾸던 사랑을 어떻게 실현해 가는지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전부를 던져야만 얻어낼 수 있는 의미의 완성인 것입니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작품은 영국의 당시 사회상을 그려낸 것입니다. 이 작품이 지니는 문학성은 우리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합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지각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일까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시대를 넘어서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일정한 정신적 구성물이나 사회적 법칙 혹은 생물학적 본성이 우리의 인식에 앞서 우리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귀족에게는 당연히 우성인자를 남기려는 자기보존 본능이 진정한 현실로서 인식될 것입니다. 하지만 작품의 저자는 그러한 선 이해를 오만과 편견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의 이러한 지각을 허상이나 공상으로 폄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지각으로 공감합니다.

당시의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을 왜 오만과 편견으로 지각했는지 저자의 주관적 의식을 분석하는 것은 이 작품에 대한 우리의 광범위한 공감을 설명하는데 분명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달리 표현해 본다면, 저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우리의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감동(感動)이라고 표현합니다. 도대체 이 감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마도 우리가 지각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동일한 지평에서 움직이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실존하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동일한 대상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감동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지각합니다. 이 세계는 단순히 있음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을 자기보존 본능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생물학적 인간관은 인간의 기원을 밝혀냈는지는 모르지만, 그 발견으로 우리의 감동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기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생물학적 속성을 발견하려는 학문적 시도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당사자에게 학문적 명성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지금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생물학적 중심을 정당화할 뿐입니다. 감동이란 지금 우리의 모습이 있어야 됨으로 지각될 때 발생하는 존재의 흔들림입니다. 이른바 자연적인 인과법칙이 끊어지는 곳에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던져 세상과 마주합니다. 어쩌면 양자는 동시에 발생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 그러한 것입니다. 사랑이 나를 선택했을 때, 나의 생물학적 인식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내가 자신의 전부를 던져 그 사랑을 맞이했을 때, 갈등은 종말을 고하고 나와 세계는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바로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적 보존본능이라는 필연의 끈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와 세계 그리고 타인이 자신의 전부로서 만날 때,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거스르며 존재의 약동을 지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펼쳐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이해와 사랑을 우리가 몸담고 있는 관계라는 존재의 지평 내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지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의 완성을 소재로 하는 작품과 비슷한 논조가 훨씬 이전에 쓰였거나 혹은 이후에 쓰인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동일한 종류의 감동으로 존재를 일깨워낼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지각되는 존재의 지평은 인간실존을 표상하는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열릴 수도 혹은 닫힐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던져 우리는 세계의 전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현실이 우리를 아무리 엄습해도, 우리가 그것을 외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우리 모두가 동일한 존재의 지평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픔을 느끼는 통점(痛點), 접촉을 느끼는 촉점(觸點), 압력을 느끼는 압점(壓點), 따듯함과 차가움을 느끼는 온점(溫點)과 냉점(冷點) 등은 나와 타인을 묶어주는 대표적인 존재의 지각들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나와 세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 갈등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고자 하는 시도는 우리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서라기보다, 이미 우리의 삶 한 가운데서 발생하는 존재의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조화되고 틀에 맞추어서 생각하며 때로 세계와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개체로서 존재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의미가 결핍된 세계 속에서 동화되어가는 자신에게 연민과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과 사물이 동일화되는 과정을 겪을 때, 우리의 삶은 진리가 드러나는 장소가 될 수 없습니다. 우연히 주어진 삶이 평생 지고 가야될 무거운 짐으로만 지각될 뿐입니다. 도심 속에서 시간에 쫓기며 커다란 기계의 부품으로서 살아갈 때, 우리는 세계와의 관계맺음이 주는 풍요로움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학과 회화 혹은 철학적 상상력 등이 우리의 존재를 일깨우는 순간이란 우리가 잊혀진 존재의 지평을 다시 기억해 내는 순간입니다. 오늘날 실증적 사고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의 삶 속에서 존재의 영역을 지워버립니다. 망각의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존재를 기억할 수 있는 삶의 통로마저 차단돼 버립니다. 중요한 건 이론이나 인과의 법칙을 통과하는 기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의해 무엇이 지각되는지를 스스로 기억해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관계로서 펼쳐지는 존재의 지평에서 무엇이 우리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존재의 균열을 일으키는지를 기억해 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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