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회의의 시대
근대 이후 세계 각국은 민주주의를 사회 근간으로 채택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인격적으로 동등하다는 내용으로 천부인권을 정하고 기본법으로 채택하게 됩니다. 인권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의 유무가 한 사회의 건전함을 구별하는 척도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정의로운 사회의 도래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민중들의 피와 땀은 이성적 사회가 실현되는 자양분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철학자들의 지적 노력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철학자들은 화석화된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형이상학적 독단과 싸웠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일생을 불태웠던 수많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우리의 경외심을 얻을 만큼 충분히 명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인격적 평등함이란 단순한 이론적 확신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어떨까요? 그들에게 짓궂은 질문을 한번 던져 봅시다. “왜 모든 인간이 인격적 존재로서 무조건적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관찰력이 충분히 섬세하다면, 질문 앞에서 그들의 얼굴에 스치는 당황한 기색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자명한 것에 의문을 던질 때, 우리 모두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였던 다수 민중들의 삶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그들은 혼신을 기울였습니다. 정치적인 핍박으로부터 벗어나 다수의 민중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그들은 투쟁하였습니다. 기득권자들에게 단순히 정서적인 관용과 관대함을 요구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눈에 부질없는 도로(徒勞)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가장 간결하고, 가장 강력한 논거는 자연으로부터 옵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도 가장 쉬운 길을 선택합니다. 가장 자명한 것의 근거를 자연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개인의 인격과 행복에 이르는 권리란 자연 상태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자유롭게 자신을 실현할 수 있으며, 그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그러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설명을 통해 정당화 됩니다. 자연적 권리라는 개념은 더 이상 설명을 필요치 않는 가치 자체가 됩니다. 우리는 왜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될까요?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자에게는 논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정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니까요.
보편적인 의미에서 인격적 권리도 동일한 정당화 과정을 겪습니다. 인격적 평등함을 자연권으로 간주하였던 철학자들의 논의는 단순히 인격적 정체성에 대한 이론적 수용 과정이었습니다. 다시 엄격하게 정리해 봅시다. 철학자들은 인격적 정체성과 평등함을 사유여행을 통해 증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으로 들어온 ‘나’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합법화시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명이 아닌 선언이 되었습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규정한 인권선언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이 오늘날 인격적 평등을 둘러싼 논쟁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우리 시대는 의심과 회의가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각광을 받는 시대입니다. 철학적 상상력의 회전축도 자명한 공리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증명되지 않은 단순한 선언은 과감히 폐기할 수 있는 시대가 오늘날 입니다. 자명한 것으로 강요되었던 모든 가치들이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되는 바야흐로 해체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 모든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는 실증 학문의 약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논의가 인격의 평등함과 무조건성을 선언적으로 정당화하는데 그쳤다면, 오늘날의 논의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습니다. 모든 가치에는 근거가 있어야 됩니다. 행여 우리가 그 근거를 찾는데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가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인격이 그동안 누려왔던 지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를 찾지 못한다면, 자신이 누려왔던 온갖 특권을 내려놔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경험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하려는 실증주의적 사고가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입니다. 모든 인격체들이 무조건적으로 평등하다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험적 증명이 학문의 최고 가치로 평가되는 시대가 열린 덕분에 발생한 결과입니다. 실증학문이란 무엇일까요? 잠시 실증주의에 대해 짚고 넘어갑시다.
사전적인 설명부터 볼까요? 실증주의는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인식론적 경향을 총칭합니다. 실증주의는 어떤 사실이나 현상의 배후에 초월적인 존재나 형이상학적인 원인을 전제하는 것에 반대하고,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만을 인식 대상으로 제한합니다. 사실들 간에 성립하는 관계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그 자체로 해명하려고 하는 과학적 태도입니다. 19세기 후반 콩트(Auguste Comte, 1798~1857)가 자신의 주저,『실증철학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에서 실증적 탐구방식을 천명한 이래, 유럽전역으로 퍼진 학문적 세계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소 부정적인 평가로부터 시작합니다.
실증주의는 앎에 대한 인간의 욕구와 집착이 빚어낸 존재의 변종입니다. 시간적으로 앞선 과거의 발생을 근거로 현재의 사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태들의 선후관계를 일정한 법칙에 의거하여 그 필연성을 규명함으로써, 우리가 사태를 파악하고 개입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주는 학문적 태도인 것입니다. 실증주의는 과학적 객관성을 생명으로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단순히 인식론적 방법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존재자에 대한 본질적인 태도변화는 인격적 정체성을 둘러싼 우리의 주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모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의 형상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내재적 목적론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실증주의는 이러한 내재적 목적론에 검증가능성이라는 객관적 잣대를 들이댑니다. 경험적 관찰에 의거한 인과의 법칙이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목적 자체로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합니다. 우리의 지식을 원인과 결과라는 형식적 틀로 끼워 맞추는 실증주의적 태도는 당연히 매력적인 학문적 방법론이 됩니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대단히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기원을 추적하여 그로부터 드러난 결과를 통해 사태를 설명하는 방식이야말로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학문적 정신에 가장 적합한 존재적 코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실증주의를 인식론적 진보라고 부르지 않고, 존재의 변종이라고 폄하하는 것일까요? 변종은 실증주의가 아니라, 현실의 근거를 눈에 보이지 않는 목적의 세계에서 찾으려는 형이상학 혹은 존재론이 아닐까요? 우리의 의도는 실증주의적 사고를 폐기처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왜곡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실증학문이 자칫 함몰될 수 있는 독단에 있습니다. 실증주의적 사고는 우리의 의식과 세계의 겹쳐짐 속에서 부유하는 수많은 가치와 의미 그리고 관념을 경험과 증명이라는 틀 안에 묶어 놓고, 여각(餘角)을 무시한 채 자신의 지각만을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단선적인 인과관계의 설정은 우리에게 펼쳐지는 다채로운 현실세계를 추상적으로 반영할 뿐입니다.
무엇을 추상적으로 묘사한다는 말은 회화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추상적 묘사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 않고, 순수한 점이나 선, 면, 색채에 의해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재에 대한 추상화 작업은 고도의 분절화작업입니다. 이러한 분석적 방법은 우리가 사태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데 분명 도움이 됩니다. 인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미술학파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특정한 부분을 떼어내어 그것을 통해 실재를 강렬하게 재구성해낸 것이지요. 이러한 작업은 구체적인 전체를 이해하는데 분명 탁월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분이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부분의 총계가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대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실증주의적 사고는 환원될 수 없는 실재를 그 무엇으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일종의 현실 왜곡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가 현실의 특정한 부분을 강열하게 조명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왜곡이 부정적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종종 망각되곤 합니다. 이른바 자신의 시도가 실재의 왜곡이라는 사실을 지각하지 못할 때 입니다. 이때 환원은 독단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환원의 독단에 묻혀 편하게 지내는 동안, 우리는 일상적으로 너무나 확실하다고 믿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실증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의 장에서 더 논의 할 것입니다.
실증주의적 인식은 객관성이라는 이름하에 원인과 결과라는 고정된 틀로 현실을 재단합니다. 칸트 이래로, 인과의 법칙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의 테두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원인과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되는 테두리, 즉 한계라는 단어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려야 합니다. 인간 인식의 한계라는 어구는 다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두 가지 의미만을 고찰해 보겠습니다.
첫째, 한계는 당연히 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경계 혹은 목적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지식의 완성하는 작업이란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마지막 경계선까지 걸어가는 일입니다. 마지막 선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인식은 자신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실증주의는 이점에서 인식론적 강점을 갖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한계가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의미는 인간적 자유가 출발하는 지점입니다. 이것이 한계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실증주의는 한계라는 인간적 개념을 상술한 첫 번째 의미에 국한시킵니다. 여기서 가장 일반적인 오해가 발생합니다. 한계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마지막이라는 이미지를 던져 줍니다. 더 이상 우리가 지나갈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종착역이라는 의미 말입니다. 그래서 한계라는 단어에는 종종 부정적인 삶의 경험들이 차곡차곡 덧 씌워집니다.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그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계가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만을 내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한계로부터 무엇이 지시되는지를 고찰할 때 밝혀집니다. 바로 그 한계로부터 우리가 자유와 희망이라는 존재론적 지평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독일 고전철학이 철학사에 남긴 흔적이자 철학사적 의의(意義) 입니다.
칸트와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셸링(Friedrich W.
Joseph Schelling, 1775~1854)에 이르는 독일 고전철학은 인간적 자유의 의미를 밝힌 주옥같은 글들을 철학사에 남깁니다. 그 흐름을 나름대로 집대성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철학적 통찰은 한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혀줌으로써, 한계가 인간적 자유가 확대되는 구체적인 통로임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그의 사유에 잠시 머물러 봅시다. 헤겔은 자유를 우리가 자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형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이 절대자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헤겔에 있어서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인간의 정신을 절대정신으로 편입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의미를 우리는 생활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상대적으로 인지된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과 장애물을 안고 살아갑니다. 얼핏 우리의 꿈과 희망을 가로막는 숱한 외적 장애물들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적인 억압, 경제적인 빈곤, 사회적 역할에 대한 불만족, 인간성의 물화, 인간에 의한 인간소외 등은 우리의 자유가 부딪힐 수 있는 존재적 한계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계가 지니고 있는 의미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언뜻 부정적으로만 비춰지는 존재적 한계는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색을 우리 내부에서 일깨웁니다. 우리의 정신은 세상이나 그 안에 속한 어떤 것을 낯설게 느끼거나 자기실현의 장애물로 여길 때 스스로 좌절 합니다. 하지만 좌절과 절망의 어두운 터널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의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그 기억을 잊고자 애쓰는 시간이 돌아옵니다. 그때 불현 듯 우리는 그 한계 안에서 몸부림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우리가 단순한 자연의 존재자에서 자유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주체란 한계의 저편에 놓인 세계로 비상할 수 있는 의지의 존재로 깨어나는 ‘나’를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이때 주체와 세계는 서로 상충하고 대립되는 두 존재가 아닙니다. 주체와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고 일깨워주는 지평으로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한계란 세계로부터 ‘나’를 단절시키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세계로 나의 존재를 이어주는 통로인 것입니다. 헤겔은 이렇게 한계를 긍정하고 극복하는 인간의 정신적 모습에서 인간과 세계의 존재론적 화해를 봅니다.
원인과 결과가 지배하는 세계는 인간의 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경계이자 한계입니다. 경계는 지식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이라는 점에서 인과의 법칙은 학문적으로 여전히 유용한 틀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정신의 힘과 상상력을 갖추지 못할 때, 혹은 그것을 포기하고 부정할 때, 우리의 존재는 왜곡의 길을 걷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과의 법칙을 인식의 유일한 틀로서 인정했던 칸트조차도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위해 목적의 세계를 요청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 증명할 순 없지만,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존재의 세계를 요구한 것입니다.
실증학문이 바라보는 현실이란?
실증주의적 지식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모델이 실용성을 극대화시킨 현대의 과학기술사회입니다. 사회의 요구에 따라 우리는 사물의 원인과 기원을 추적하는데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소위 우리의 이해 안으로 들어오는 세상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원인이자 기원이 됩니다. 원인과 기원에 사로잡힌 고정관념이 어떻게 존재의 세계를 왜곡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집니다. 진부한 소재이지만, 언제 들어도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그 둘은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참 쓸모없는 질문처럼 보입니다. 두 남녀가 사랑한다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 걸까요? 사랑의 이유를 묻는 것은 가십거리나 찾는 대중잡지에나 어울릴 것 같은 심리주제처럼 보입니다. 학문적 주제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기원을 추구하는 실증학문에서는 얼마든지 학문적 주제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의 원인을 추적하여 밝히는 것이야말로 학문의 진정한 과제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잠 못 이루는 밤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학문의 영역이 바로 실증학문입니다. 반드시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어쩌면 오늘날 실증학문의 성공요인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남녀 간의 사랑에 관한 실증주의적 논증은 매우 이해하기가 쉬우며, 그래서인지 설득적이기까지 합니다.
일반적으로 남녀 간의 사랑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사랑의 대상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말입니다. 전통적인 구분법은 외모와 사회적 능력입니다. 남성이 여성의 외모에 집착하는 반면, 여성은 이성의 사회적 지위나 성격에도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경험되는 것들이니 굳이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남성은 사랑을 받기위해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얻고자 노력하며, 여성은 아무래도 남다른 빛나는 외모에 승부수를 던지는 법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행해지는 성형수술의 빈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더 구체적으로 물어 봅시다. 왜 남성은 여성의 외모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요? 특히 남성이 동서고금과 노소를 불문하고 젊은 여성을 선호하는 현상은 어떠한 생물학적 근거를 지니고 있을까요? 여성의 사랑방식에도 우리는 동일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여성은 남성에게서 단순히 외모만을 취하지 않습니다. 여성에게는 상대방의 성격이나 경제적 능력도 외모 못지않게 중요하게 고려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남성과 여성이 각각 상대방으로부터 취하는 성적 매력의 상이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성의 차이에 관한 한 철학적 혹은 윤리적 고찰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돈과 외모로 주고받는 사회를 우리가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그 비난이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적 상상력도 예외는 아닙니다. 가장 예리한 눈으로 기존의 사상과 질서를 비판하며 자신의 시대를 설명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사상가들도 성의 차이를 논하는데 있어서는 기존의 관습과 편견을 답습하기 일쑤였던 것입니다. 여성이 오직 종의 번식을 위해서만 창조되었고, 여성의 자질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러한 생물학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데 모아져 있다고 비난했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에게서 우리는 의미있는 철학적 메시지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3mm만 낮았더라면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며 성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에게서 우리는 별다른 학문적 통찰을 얻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남녀의 사랑과 관련된 자연과학적 탐구는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합니다. 현대의 진화생물학적 인간관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철학적 혹은 윤리적 관점이 아닌 실증적 관점에서 접근해 갑니다.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짝짓기게임의 대 원칙이 인간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연번식을 진화론적인 언어로 표현해낸 자기보존의 법칙이 그것입니다. 진화생물학자의 관찰에 따르면, 남성이 몸매가 좋은 젊은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젊은 여성이 비교적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으리라는 본능에 이끌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생물학적 근거는 여성이 즐겨 찾는 사랑의 대상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여성이 남성에게서 외모보다 성격이나 경제적 능력을 더 중요시하는 이유는 단순한 속물근성으로 치부할 수 없는 진화의 법칙이 숨어있다는 겁니다. 그 법칙은 아이의 양육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남성의 성격이나 경제적 능력이 아이의 양육에 유리할수록 여성은 그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낀다는 겁니다. 생물학적 인간관은 이러한 자연적 인식이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DNA속에 진화론적 결과로 각인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무의식의 영역에서 여성은 이성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조건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 DNA 속에는 이미 그러한 코드들이 우리의 행동양식을 결정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서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이 그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은 자명해 보입니다.
다윈의 진화이론은 그의 학문적 성실함만큼이나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과학의 영역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일찍이 후꾸야마가 지적하였듯,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는 인류의 가장 진화된 생존 시스템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의 중심부에는 종종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을 인간사회에 적용시켜 만들어진 변종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실증주의적 고찰방식이 사회진화론이라고 부르는 담론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사회진화론은 자연적 약육강식의 법칙이 인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연이 무구한 시간과 더불어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듯, 인간사회도 동일한 원리 하에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보존법칙이라는 불변의 법칙을 충실히 쫒아가며, 사회진화론은 우성인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진화의 원리 안으로 어떠한 철학적 개입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DNA는 자연스럽게 우성인자를 남기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강한 후손을 남기는 것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시간의 의미이자 진화의 방향이 되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법칙을 통과하며 형성된 진화생물학적 이론은 당연히 오늘날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오랫동안 인류문화를 지배해온 인간적 가치들이 송두리째 추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핵심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서 곳곳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며, 오늘날까지 각광을 받고 있는 실용주의와 공리주의는 진화론의 핵심을 여전히 자신 안에 품고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현대적 언어로 얼마든지 포장될 수 있습니다. 보편적 인격이 그들의 공통된 공격목표가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목적으로 보호되는 인격은 검증 가능성이라는 기준에 비춰보면 당연히 형이상학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인격적 존재라는 명제는 증명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모든 이에게 동일한 불가침적 인권을 부여하는 것은 공리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의 눈에는 구시대에서나 통용되었던 종교적 유물정도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증명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인격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이론적 호기심이 여전히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가치를 공격할 정도로 그렇게 강력할 수는 없습니다.
강력한 도전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 요청에서 유래합니다. 우리시대의 실증적 학문은 사태를 원인과 결과로 분석하는데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개입과 조작에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의학자가 암이 발생하는 원인을 정열적으로 추적하는 이유는 단순히 지적 호기심 때문이 아닙니다. 동력은 암의 발생 과정을 밝혀 진행을 멈추기 위함입니다. 유전자 지도를 해명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의 조작가능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생물학과 의학, 생명공학 등은 이러한 실천적 의미를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증학문들이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 가는데 근본적인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과 인권이라는 목적론적 실체입니다. 인격의 무조건성이 법적 기제로 굳어지며, 임의적인 실험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실증학문이 보편적 인격과 인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입니다. 왜 인간만이 불가침적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요? 비록 고도의 지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 또한 자연의 한 조각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자연성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인간이 점하고 있는 지위 또한 무조건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현상이란 우연적인 것이며 시간과 더불어 소멸해 가듯, 인간의 ‘격’ 또한 무조건적일 수 없다는 주장이 실증학문의 이유 있는 항변인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인격에 대한 현대의 도전이 어떠한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오늘날 실증과학은 왜 전통적으로 인간적 삶의 근간을 이루었던 인격의 문제에 부정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서는 현실적인 문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격이라는 지적 실타래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인간에 대한 학문적 개입과 조작의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실증과학이 제기하는 인격과 관련된 질문은 대단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왜 적극적 안락사는 본인의 자유의지에 상관없이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나요?”
“자의적 임신중절은 왜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요?”
실증과학은 한발 양보하는 관대함까지도 보입니다. 인격이 지니고 있는 보편성과 무조건성을 그들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격체라고 불릴 수 없는 사람들인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요? 그들은 도전적으로 묻습니다.
“이성, 도덕적 자유의지 등을 갖추지 못한 심신장애자, 미래의 계획이나 삶의 희망, 혹은 타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스스로 포기하며 살아가는 노숙자들에게는 왜 동일한 불가침적 인권이 부여되는 것일까요?”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도 실은 인격과 인권의 보편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는 파렴치한 중범죄자들의 삶의 자리는 왜 법적으로 보장돼야 하는 것일까요?”
“왜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높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며, 정상인들의 전체적 행복지수를 낮춰야만 하는 것일까요?”
장기이식에 어느 정도 기술적 자신감을 얻고 있는 의학계는 우리에게 아주 솔깃한 제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사형수들의 장기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말입니다. 컴퓨터 혁명과는 비견되는 또 다른 혁명을 준비 중인 생명공학은 다음과 같은 도발적 질문으로 전통적인 인격개념을 압박합니다.
“왜 인간은 생물학적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까?”
오늘날 생명공학의 다양한 응용분야들은 인격과 인권이라는 개념을 제한된 영역에서 사용하자고 주장합니다. 사실 그들의 논조가 비인간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도가 휴머니즘의 확대에 기여한다고 반박하기도 합니다. 근래에 각광을 받고 있는 응용학문 분야인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을 예로 들어 봅시다. 이 분야는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성질과 능력을 개선하고 강화하려는 지적, 문화적 운동을 총칭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장애나 고통, 질병, 노화, 죽음과 같은 자연조건들을 인간적 한계라고 간주하여 왔습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시대에 인간적 조건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이 아닙니다. 한계는 본질이 아닌 것이지요.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정신이야 말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기존에 꿈꾸지 못했던 새로운 휴머니즘의 도래를 위해 이젠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적 실험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인격이라는 형이상학적 쇠말뚝을 제거하는 일이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로 간주됩니다.
과학기술과 그에 힘입어 발전된 생명공학의 다양한 응용분야들이 형이상학적 인격개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현실적 요청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 요청은 철학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며, 그를 통해 실현됩니다. 어느 학문보다 참된 지식의 토대를 형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실증주의는 가장 강력한 인식론입니다. 여기에 다양한 철학적 이론들이 덧붙여집니다. 어떠한 입장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존엄한 인격의 조건
전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격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입니다. 중세를 거치며 그 개념의 내포와 외연이 확대되지만, 어디까지나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적 지평을 떠나서는 결코 논의될 수 없습니다. 인격의 개념적 역사를 다루는 관련 학자들은 일관된 목소리로 이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존엄성과의 관련성입니다. 칸트는 전통적인 입장들을 정리하여 인격이라는 동전의 뒷면에 존엄성이라는 개념을 새겨 넣었습니다. 인격이란 자신 이외에 어떠한 외적 원인도 취하지 않습니다. 인격체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원인이자 목적이 되는 실체를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칸트는 존엄성의 세계에 가격의 세계를 대비시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격이란 대체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인격체는 선험적 주체이며, 실천이성 즉 모든 윤리적 행위의 선험적 조건이 됩니다. 이로부터 연역되는 인간적 자유의 형식은 이후 정치철학사에 한 획을 긋기도 합니다.
인격과 존엄성 그리고 자유의 존재론적 연관성을 논하는 칸트철학 전체를 추적해 가기란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당연히 우리의 과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점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란 근본적으로 개인이 지니고 있는 실천이성의 능력이자, 이른바 윤리적 행위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칸트의 인식론적 공적은 인간의 인식을 인과법칙에 묶어 둔 데 있습니다. 기존의 형이상학이 신, 자유, 사랑 등과 같은 초월적 대상을 인식의 영역에서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철학사가 믿음들이 서로 충돌하는 전쟁터로 변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앞서 칸트의 인식론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종종 발생하는 오해는 칸트의 인식론을 그의 전체 철학에서 분리시켜 독립된 철학사적 공적으로 이해할 때 발생합니다. 최소한 저자의 눈에 비친 칸트의 인식론은 실천철학으로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합니다. 그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를 지식의 영역이 아닌 마음의 영역,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실천의 영역에서 정당화하고 싶었던 겁니다.
인간의 이성이 우리의 지식에서 그쳐버린다면, 다시 말해서 인과의 법칙이 인간의 실천적 영역까지 좌우한다면, 그것이 인간적 삶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해 집니다. 왜냐하면 윤리적 행위의 가능성과 그 풍요로움이 현저하게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외적 원인이 모든 행위의 시작을 결정하는 곳에서, 인간의 윤리적 자유는 어떠한 여지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예컨대 아무런 조건 없이 타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대표적인 윤리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윤리적 행위가 ‘대가’라는 외적 원인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윤리적 행위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지요. 결국 이타적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외부적 자극에 의한 신체반사행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진화생물학은 이타적 행위의 원인을 자기이익에서 찾습니다. 이타적 행위란 자신을 보존하려는 본능적 욕구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현재)의 선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과연 이타적 행위는 생물학적인 자기 보존본능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것일까요?
칸트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를 자연적 본능으로부터 구원하려고 시도합니다. 방법론적으로는 상당히 특이한 환원적 증명을 시도합니다. 먼저 그는 본능이나 욕망과 같은 외적 원인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인간의 자율성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율적 인간을 윤리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선험적 주체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 머무는 동안, 우리는 자연적 존재가 아닌 이성적 존재로서 존엄성의 담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성이 윤리적 행위로 자신을 강제하고, 그 행위를 의지를 통해 자신에게 의무지울 때 비로소 인간은 존엄한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당연히 우리는 칸트의 논의가 지니고 있는 환원적 성격을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칸트의 논증을 이해할 수 있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칸트가 서 있는 지평을 우리가 동일하게 지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칸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함께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존엄성의 주체로 이해할 수 있는 동일한 존재론적 지평위에 서 있게 되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의식과 세계가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존재의 지평입니다. 그 지평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면서 발생하는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는 결코 증명될 수 없습니다. 그 지평은 주체가 세계 속에서, 세계가 주체 안에서 서로를 확인할 때 열려지는 존재론적 지평입니다. 우리는 칸트와 함께 그 지평을 실천을 통해서만 지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격의 존재론적 정당화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부터 상세하게 논의할 것입니다. 어쨌든 실증학문의 성과에 힘입어 인격의 외연과 내포를 정리하고자 시도하는 진보논객들은 인격을 둘러싼 형이상학적 혹은 선험적 논증을 전형적인 보수이론으로 매도합니다.
그들이 회의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지각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그들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출발하고 있는 지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그 지점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경험론적 인격이론이 그것입니다. 서양 철학사를 양분하는 경험론과 합리론이라는 두 지평이 인격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그대로 재연됩니다.
인격의 경험론적 증명
경험론적 입장은 인간 존재를 특징짓는 인격을 일종의 자연 현상처럼 규정합니다. 자연현상이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순환과정에 놓여 있듯, 인격 또한 필연적일 수 없다는 겁니다. 인격의 우연성과 함께 다른 생물체와 비교하여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온 인간만의 절대적 지위는 부정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절대적’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대적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적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사회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의 얼굴을 지니고 있는 모든 개별적 존재에게 적용된다는 뜻이지요. 경험론적 입장은 인격에게 무조건적 지위를 부여하는 전통적 관점이 모든 학문적 논쟁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학문적 논의가 효용성을 얻기 위해서는 종교적 믿음에서 벗어난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객관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무엇이 인격을 목적 자체로서 인정하도록 강요했는지 그 내용적 검토를 요구합니다. 얼핏 학문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제안은 경험론적 인격이론이 자신의 실용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취하는 전략적 시도입니다.
목적 자체로서의 인격 개념을 옹호하기 위해 전통적인 단골메뉴로 인용되었던 인간의 이성능력이 놀랍게도 경험론적 인격이론의 주된 논증도구로 변합니다. 지성사에 교차하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경험적 인식론의 대가였던 로크(John Locke, 1632∼1704)가 이 분야에서 가장 빈번히 인구에 회자되는 철학가입니다. 개별적 존재의 인격적 동일성을 이성능력과 결부된 의식의 동일성으로 간주했던 로크의 논의는 다양한 경험론적 인격이론의 공통된 출발지점입니다. 물론 로크 본인에게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그가 인격적 동일성을 주장하며 이성능력을 거론할 땐, 인식론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식론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불려 다니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쨌든 그의 논의는 인격의 무조건성을 부정할 수 있는 최초의 교두보로 인용됩니다. 조금 길지만 그의 논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을 전제로 해서 인물 (내지 인격인 동일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인물(인격인)이란 무엇을 나타내는지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인물이란 의지와 성찰을 지니고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하는 지능이 있는 자,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똑같은 사고를 하는 사물이고, 이와 같은 것은 사고와 분리할 수 없는, 사고에 본질적으로 생각되는 의식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그것은 누구나 자신이 지각하는 것을 지각하지 않고 지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내가 어떤 사물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맛보거나, 만지거나, 사색하거나, 의지하거나 할 때,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이렇게 아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현재의 감각과 지각에 관해서 있고,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어서 자기 (내지 자아)로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이 경우, 같은 자아가 계속해서 같은 실체에 있는지 다른 실체에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이 언제나 사고에 동반하고, 이 의식이 모든 사람을 그 사람이 자기로 부르게 하고, 이에 따라서 그 사람 자신을 다른 모든 사고하는 사물과 구별하므로 이 의식에만 인물 동일성 즉 이지적인 자의 동일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로크는 인격의 본질을 둘러싼 제반 형이상학적 토론의 무용(無用)함을 주장합니다. 형이상학적 토론은 인간의 동일성과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생산성 없는 주관적 관념으로 포장할 뿐이라는 겁니다. 로크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적 표상들이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로부터 인간존재의 실질적 근거들이 실종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근거 하에, 로크는 인격적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기 위해 객관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이성적 능력을 통한 자기의식이 그에게는 구세주로 등장합니다.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의식하고 확인할 수 있는 자에게 우리는 어떤 인물이라는 인격적 동일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예컨대 누군가가 치명적 사고로 인해 과거의 기억을 모두 상실했다면, 우리는 그를 이전과 동일한 인물로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그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인격체가 된 것입니다. 이 관점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확대 적용하게 되면, 일반적 상식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먼저 이성의 속성과 인격적 행위의 연관성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인격적 행위라는 표현에 주목해 봅시다. 인격적 행위란 일정한 가치를 지향하는 정신적 활동이기 때문에 이성적 의식을 전제로 합니다. 인격적 행위란 자유와 책임이 따르는 삶이며, 그 삶으로부터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지요. 반면 그 반대편에는 비인격적 행위가 놓여 있습니다. 자기 보존본능이라는 생물학적 중심에서 나오는 행위가 직접적으로 비인격적 행위인 것은 아닙니다. 단순한 생물학적 중심이 인간적인 삶의 전형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습니다. 비인간적인 것은 그 이상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에 비인간적으로 변해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가 지니고 있는 존재론적 비밀입니다. 얼마 전 일간지 사회면에 실린 기사가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일부 아파트에서 분양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 사이에 담과 철조망을 쌓았다고 합니다. 일반 거주자들이 임대 아파트를 격리시킨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극히 자연적입니다. 임대 아파트로 인해 분양 아파트의 지가(地價)가 하락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로 인해 임대 아파트의 거주민들이 정문을 이용하지 못하고 돌아서 단지를 벗어나야하는 번거로움이 생겼다고 합니다.
본인 소유의 지가하락을 막기 위해 상대방을 격리시키는 행위는 자기보존본능의 연장입니다. 그러나 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지극히 비인간적 행위가 되는 것이지요. 그 사이는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란 생물학적 중심을 벗어나서 존재의 지평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것의 부재는 생물학적 중심으로의 추락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파괴하는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비인격적 행위는 인격적 행위가 지향하는 이성적 가치를 파괴합니다. 비인격적 행위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편 우리의 경험으로 들어오는 인격은 하나의 속성만을 지닌 동일자를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에 주목해 봅시다.
“너 참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인격의 사용방식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동일한 개별적 존재자 안에 상이한 인격이 스쳐갈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인격이 단수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중인격 혹은 다중인격 이라는 표현은 동일한 개인에게서 상이한 인격적 속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듯 로크의 인격이론은 엄격한 이론적 증명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생활세계를 경험적으로 표상하고 있으며, 인격에 대한 논의에 이성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그 개념을 공공의 토론장으로 불러냅니다.
로크가 주장하는 경험주의적 인격이론은 그 자체로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지 않습니다. 경험론적 전통이든 혹은 합리론적 전통이든 나름대로의 의미맥락을 지니고 있으며, 그 맥락이 사상된 채 어떠한 이론이 논해지는 것은 정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로크의 의해 주장되는 인격의 동일성은 책임의 귀속여부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우리는 로크에 의해 주장된 의식의 동일성을 반드시 전제해야만 합니다.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혹은 그것이 타인에게 어떠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유발했는지 전혀 의식할 수 없는 정신이상자에게 종신형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성적 판단과 인격의 동일성이 애초 의도된 맥락에서 분리된 채 적용될 때 발생합니다. 현대 인격이론의 공리주의적 해석이 바로 그것입니다. 공리주의적 인격이론은 인격을 현존하는 일정한 이성적 속성들 혹은 그 결합으로 규정하는 로크의 시도를 철학적 기초로 삼습니다. 그런데 그 현실적 결과는 로크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인간과 인격체가 이성적 의식이라는 일정한 기준의 유무에 따라 분리되는 것입니다. 이 결과는 우연한 부산물이 아니라, 공리주의에 의해 애초부터 의도된 것입니다.
인격을 현존하는 일정한 이성적 능력으로 제한할 경우, 우리는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실은 그것이 공리주의적 논의가 원하는 실천적 결과이기는 합니다. 대표적인 결과가 인격체에 대한 차별적 인정입니다. 이성적 의식을 소유하고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구별은 단순한 이론적 차원을 넘어서 권리의 소유문제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처음 우리의 논의가 출발했던 지점을 기억해 봅시다. 모든 인간은 인격적 존재이며, 그에 상응하는 동등한 지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인격적 존재에게 일정한 조건을 부여할 경우, 이 명제는 언제나 유효한 정언명령으로 더 이상 기능할 수 없게 됩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점해왔던 지위와 권리는 이제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인격체의 지위로 대체됩니다. 인격체의 지위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권리를 소유한 인격체들은 그 권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사회적 조건을 계속 충족시켜야만 됩니다. 그것의 결과는 생각보다 놀랍습니다. 정상적으로 생산 활동에 종사하며 일정한 세금을 지불하는 정직한 사회 구성원에게는 불가침적인 지위와 인권이 계속 부여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성실하고 바람직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구걸로 연명하는 노숙자로 전락할 수 있으며, 갑작스런 사고로 정신지체자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때 상황은 우리의 외모만을 바꿔 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간 누려왔던 사회적 지위도 빼앗기게 됩니다. 사회는 우리에게 인격체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부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며, 혹은 그에 대한 어떠한 철학적 근거도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심리적 연속성
영국의 철학자 파핏(Derek Parfit, 1942∼현재)은 인격의 동일성과 관련된 그의 주저『Reasons and Persons』에서 경험주의적 버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입장을 대변합니다. 어떠한 주체나 소유자를 전제하지 않고도 심리적인 사건이나 상태의 인격적 묘사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방법론적으로 그는 합리적 실체와 인격의 동일성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논증관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테제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인격을 확인하는 과정이란 어떤 식으로든 의식과정의 실제적인 연속성과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그의 주장은 한 인격체 혹은 자아의 실존이란 심리적 연속성을 묘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아니라는 결론으로 귀착됩니다. 시간을 거슬러 항상 자신과 동일한 중심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과정으로부터 독립된 자발적인 실체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뇌와 신체 그리고 물리적, 심리적으로 서로 연관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만 인격의 동일성은 지각될 수 있다는 겁니다.
얼핏 그의 견해는 로크와 흄(David Hume, 1711∼1776)의 경험론을 발전시켜 관념론의 극단을 보여주었던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의 논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존재는 지각되는 것이다 esse est percipi”
철학사에 버클리의 이름을 각인시켰던 대표적인 명제입니다. 존재란 결국 지각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지각을 벗어날 경우 세계란 존재할 수 없으며,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즉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파핏을 버클리와 동일한 선상에서 논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정반대편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버클리에 의해 완성되었던 경험론의 정점은 파핏과는 전혀 다른 의미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파핏이 주체의 동일성을 해체하고 의식의 흐름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켰다면, 버클리는 동일한 논증을 통해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은 유일한 실체인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나름대로의 근대적 해법이었던 것입니다. 자연과학의 부흥과 실증적 지식에 대항하여 버클리는 모든 개별자들의 지각이 동일할 수 있는 근거로서 보편적인 신의 관념을 전제로 합니다. 한쪽이 심리현상에 목을 매고 있었다면, 다른 쪽은 존재론적인 선회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동일한 논증을 통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요? 파핏이 전통적인 경험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면, 그는 전통적인 경험론을 다시 추상화시켜 자신의 편으로 끌어 온 것이지요.
상상력으로 살아가는 정신의 왕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보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철학사에서 취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수단에 불과하였던 것이 목적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변형이 파핏에게 있어서 정확하게 발생합니다. 버클리와는 반대로 인격의 동일성에 대한 모든 가능한 반성이라는 것은 파핏의 견해에 따르면 종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존재는 지각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것의 유일한 내용은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연속성 이외에 그 어떤 것도 허용할 수가 없게 됩니다.
컴퓨터가 지배하는 가상 세계와 실재 인간과의 대결을 그렸으며, 과학 공상적 소재와 특수효과를 이용해 만든 영화로 전 세계적으로 흥행돌풍을 일으켰던「매트릭스」를 기억해 봅시다. 매트릭스는 일종의 가상공간을 의미합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컴퓨터는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고 통제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이미 이식된 목적에 의거하여 살아가도록 강요합니다. 이에 맞서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을 찾고자 싸우는 반란군의 이야기는 종교적 ‘구원’이라는 소재와 맞물리며 대중적 흥미를 더합니다.
이 이야기는 파핏과 관련된 우리의 주제를 설명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파핏은 뼛속까지 매트릭스의 수호자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상공간 내에서 지각된 세계체험은 존재의 전부입니다. 지긱의 세계를 벗어나는 형이상학적 실체란 있을 수 없으며, 별 의미도 없다고 판단하는 듯 보입니다. 존재의 세계를 빈 곳 없이 가득 채우는 건 각각의 지각들이며. 이 지각들이 서로 소통하고 이전되며 삶의 다양성을 그려낸다는 것입니다. 의식의 연속성에 기반을 둔 인격의 공시적 동일성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심리적 연속성을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투쟁하는 매트릭스의 반란군들은 시간과 공간을 거스르는 인격의 통시적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핏의 이론에 따르면, 아마도 반란군들의 삶의 투쟁이란 결국 시시포스의 헛된 도로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인격을 둘러싼 공시적과 통시적 동일성의 구별이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말입니다. 단순히 인식론을 둘러싼 전통적인 이론적 논쟁의 연장선일까요? 파핏의 인격이론이 지니는 철학적 관심은 단순한 인식론의 이론적 정립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그는 오히려 현실적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인권의 철학적 근거가 그의 주된 공격대상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인권을 불가침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지속적으로 교육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철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그 철학적 토대가 이른바 인격의 통시적 동일성입니다. 모든 개인의 삶은 시간과 함께 변화무쌍하지만 그의 인격적 정체성의 근간을 형성하는 인격의 동일성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분할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파핏은 인권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인격과 관련된 잘못된 철학적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지요. 인격적 정체성을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적 토대란 우리가 그로부터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권리를 주장할 만큼 근본적이지도 또한 튼튼하지도 않다는 겁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격의 됨됨이란 사물의 단계적인 경험적 속성에 불과하며 결국 인간은 인격적 속성을 지닐 수도 혹은 상실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겁니다. 파핏은 자신의 이러한 해체전략을 통해 개별적 존재의 인격을 일정한 사물의 속성을 지닌 대체될 수 있는 우연적 존재로 전락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의 전략이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변형시킬 수 있는지는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확실히 철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가장 적절하게 보여줍니다. 프랑스가 철학을 가장 많이 가르치는 나라라면, 미국은 아마도 철학적 사색이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일 겁니다. 휴 그랜트가 주연으로 열연했던 영화 중 하나인『선택, 원제 : Extreme Measures』을 예로 들어 설명해 봅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사고나 선천적인 질병으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에게 새로운 척수를 이식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한 저명한 신경외과 의사가 비밀리에 거리의 노숙자를 실험 대상으로 사용하며 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직업적 이상(理想)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부가 아닙니다. 사회적 명예도 그의 꿈은 아닙니다. 그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은 히포크라테스의 권고에 훨씬 근접해 있습니다. 열심히 살고자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장애자가 돼 버린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되돌려 주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러던 중 이제 갓 병원에 입사한 전공의가 우연히 병원의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이 둘은 자신들이 견지하는 인격에 대한 철학을 두고 맞대결을 펼칩니다. 노숙자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감행했던 신경외과 의사가 말합니다.
“난 68살이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단 말일세.
3년간 쥐로 실험하고, 다음엔 개로, 그리고 5년 후엔 침팬지로 실험하게 되겠지.
그것도 운이 좋으면 말일세.
하지만 나는 그보다 빨리 이 일을 진행해야만 되네.
난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의술을 실현시키고 있어.
신경의학의 한계선을 넘고 있단 말이야.”
이것이 그가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게 된 배경입니다. 그의 목적은 당연히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개인적 명예를 위해 그가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체 인류의 행복이라는 대의가 그로 하여금 노숙자들에 대한 인간적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양심이란 그에게 빛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정의로운 의사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노숙자들의 죽음을 의미 있는 영웅의 죽음과 비유하면서 말입니다. 의미 있는 생명들을 구할 수 있다면, 의미 없는 노숙자의 죽음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파핏의 인격을 둘러싼 철학적 논의가 영화의 한 장면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순수하게 인식론적인 토대로만 비춰보면, 파핏의 인식이론은 흄의 자아이론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흄과 함께 파핏에게 있어서도 개인의 자아란 결국 지각 혹은 관념의 다발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생명윤리 학자 툴리(Michael Tooley)는 이것을 정확하게 생명윤리 논쟁에 적용하여 인격개념의 경험적 조건을 요구합니다. 쉽게 말해 인격자로 대우를 받으려면 그만한 자격을 갖춰야 된다는 겁니다.
대상이 일정한 경험적 속성을 통해 지각되듯이, 개인의 인격 또한 대상적 속성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는 인격이란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대상적 속성으로 환원되어야만 한다고 단언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그가 얻고자 하는 실천적 부산물은 거의 확실하게 확인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근거를 낙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논리를 사용하면 임신중절의 법적 근거가 명확해 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툴리는 대표적인 낙태 옹호론자입니다. 그는 우리가 낙태를 반대할 어떠한 철학적 근거도 제시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제시된 철학적 근거는 태아를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행여 우리가 태아에게 인격적 지위를 부여할 어떠한 대상적 속성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상황이 매우 달라질 거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에 동조하여 호주가 낳은 유명한 생명윤리 학자이자 동물 해방론자인 싱어는 인격적 정체성의 기준을 일정한 능력의 소유 유무에 따라 결정하고 이를 현실에 광범위하게 적용함으로써 경험론적 인격이론을 매듭짓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기준은 광범위하게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이성적 능력입니다. 예컨대 느낌, 사고, 생존에 대한 관심, 특별히 행복의 전체 크기를 증진하려는 실천적 관심 등은 그가 제시하는 인격이론의 중심부를 관통합니다. 그래서 흔히 싱어는 기호 공리주의자라고 불립니다. 그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전통적 공리주의의 핵심을 현대의 생활양식에 적용시켜 재해석합니다. 기호공리주의란 우리가 자기 이해관계에 의해 이끌려 내려진 결정과정을 모든 사람의 이해를 고려함으로써 보편화할 때 도달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임신중절, 장애태아의 낙태, 더 나아가 자살, 안락사에도 이와 같은 공리가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그의 주저『실천윤리』에서 싱어는 전형적인 이성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못한 사람들에게 인격의 무조건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합니다. 예컨대 자신을 돌아볼 능력이 없는 심신장애인, 아직 자의식을 구성하고 있지 못한 신생아, 타인에 대한 사회적 책임능력이 결여된 범죄인, 특별히 정상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없는 장애태아 등에게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인권의 내용들을 제한하자는 것입니다. 이들의 무가치한 생존을 위해 무한대의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그 절감된 비용으로 더 많은 삶의 관심을 지닌 인격체들이 질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자는 것이 그의 실천적 윤리이론의 중심축입니다. 싱어는 전통적 인간이해의 근간인 기독교적 인간관을 비판하며, 동물에 대하여 인간만의 특별한 생물학적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마치 인종우월주의 혹은 남성우월주의처럼 생물학적 편견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경험주의적 인격이론은 우리의 생활세계와 매우 친숙하기도 하지만, 논리적으로도 상당히 정교한 토대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이론이 전통적인 인격이론에서 보이는 자체 모순을 지적할 때는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전통적으로 철학사는 인격을 정의하기 위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능력을 제시하곤 했습니다.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봅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대표하는 고대의 서양철학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중심축으로 회전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감각계를 넘어서는 지성계의 세계를 직관하거나 혹은 사물에 내재하는 형상(eidos)을 볼 수 있는 능력이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정신의 힘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신의 본성에 맞게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실천적 능력도 이성이 자신을 드러낸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후의 서양철학사의 내용도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습니다. 중세가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 코드는 신의 형상(Imago dei)입니다. 이 형상이 이성적인 인간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입니다. 근대의 합리론과 위에서 언급했던 경험론에서도 이성적 능력은 지성을 관통하는 붉은 심입니다.
인간을 다른 생물학적 종과 차별화시켰던 이성의 힘이 항상 인간성의 실현이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성은 때로 폭력의 원천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역사적 증거를 통해 우리는 이성의 양면성을 목격하게 됩니다. 제국주의 시대 서구에 의해 저질러진 남미 원주민들에 대한 비인간적 학살의 근거는 단순히 경제적인 요인만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에게만 존재한다고 믿어졌던 본질적 요소, 즉 이성적 능력이 원주민들에게 근본적으로 부재하다는 왜곡된 판단이 인간에게 잠재된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통제하는 이성적 고삐를 잘라내 버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덧붙여 경험론적 인격이론은 전통적 인간관의 자가당착을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인격을 정의하기 위해 인간에게만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특별한 능력을 전제하면서, 그러한 능력이 결여된 인간들에게 동등한 인격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대단히 모순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독일의 경험주의적 생명윤리논객인 훼스터(Norbert Hoerster, 1937∼ 현재)는 이로부터 다소 극단적인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인격체와 비 인격체의 근본적 구별이 그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인권을 일정한 경험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 제한된 인권으로 대체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그의 무차별적 독설은 관련 분야에서는 꽤나 악명 높습니다. 인간 존엄성이라는 개념은 어떠한 기술적 내용도 담지하고 있지 않은 순수한 규범적 구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인간 존엄성이라는 개념은 단지 정치적 선전도구에 불과하다는 선언은 화룡정점입니다. 인격이라고 하는 개념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는 불가침적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 담론에 의해 언제든지 그 내용이 결정될 수 있는 실용적 개념이라는 주장이 그나마 그를 이 분야의 온건주의자로 불리게 합니다.
독일의 생명윤리학자인 비른바허(Dieter Birnbacher, 1946∼현재)는 가장 급진적인 주장을 전면에 내걸고 있습니다. 인격적 동일성이 일정한 경험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굳이 우리가 인간 존엄성과 삶의 제반 권리를 위해 인격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되는지를 그는 되묻습니다. 인지적 혹은 윤리적 능력이 개인에게 그에 상응하는 다양한 인간적 권리를 부여하는 최종적 근거라면, 인격이라는 인위적 개념은 더 이상 불필요한 여분이 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근거로 비른바허는 인격개념을 실천 윤리학의 모든 분야에서 추방할 것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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