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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인격의 철학, 철학의 인격

2. 인격이라는 이름의 형이상학

by 지렛대 2023.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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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인격적 존재일까요?”

 

누군가에게 이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익숙한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층적 차별이나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단 한순간도 자신이 개별적인 인격체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법의 공명정대를 주장하는 만민평등주의가 평화의 기초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의 목적이 단순히 기능공을 양성하는 것을 넘어 넓은 교양과 건전한 인격을 갖춘 인간을 육성하려는 전인교육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 봅시다. 누군가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인격적으로 불이익을 당한다면, 우리는 그 사회를 결코 건전한 사회로 지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 간에 벌어지는 스포츠 경기에서 간혹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인종차별은 늘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인종차별을 담고 있는 언어나 행위는 경우에 따라 법적 제제의 요건이 되기도 하지요.

의학의 진화 또한 인격체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입장,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환자에 대한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하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과거의 유물만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가 지각하는 정의로운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격을 위한 철학은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에게는 더욱 절실해 보입니다. 독립적 인격체로 인정받으며 자란 아이가 자존감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자의식을 갖추고 성장한 아이만이 진심으로 타인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 원칙은 양육의 기본일 것입니다. 아울러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교육철학적 신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활세계의 근간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격적 이해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인격체에 대한 이론은 우리에게 펼쳐지는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감정의 교차를 경험하게 합니다.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거대한 톱니바퀴의 한 부품으로 변해 버린 우리들에게 상품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에 대해 아무리 이론적으로 주장해 봤자, 빛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소비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본주의 시대의 생존원칙은 인격체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과연 동등한 인격체로 태어나서, 함께 살아가며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선뜻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생활세계의 왜곡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학문의 영역에서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인격적 존재인지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지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철학적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이론적으로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이성적 존재에 대한 통찰, 중세를 통과하며 형성된 종교적 분위기, 그리고 계몽의 시대를 거치며 나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인격은 인간만의 존재론적 특징으로 정당화되어 왔습니다. 시민혁명은 투쟁을 통해 이론적으로 굳어진 인격체에게 자연적 권리라는 법적 토대를 부여합니다. 오늘날 인격은 일종의 자연적 권리로 굳어져 라는 존재를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고 있습니다. 개별 인격체는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연권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가로막힐 때는 자기실현의 권리가 침해되었음을 법적으로 호소할 수 있습니다. 행여 나의 존재가 권리라는 그림자를 동반하지 않는 경우, 우리는 현재 어두운 터널을 걷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 터널을 벗어나려는 지난한 노력이 이른바 자유와 정의를 얻기 위한 인류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때로 그것을 나의 존재가 지니는 시간적 의미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진보라는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탄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격적 정체성에 둘러싼 회의(懷疑)가 철학적 논쟁의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인격에 대한 사고의 무게중심이 이론적으로 이동하거나 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의 변화가 제반 학문으로 하여금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형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권리로 새겨져 있는 인격체에 대한 현대의 이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근대의 산물입니다. 그것도 종교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 기독교로부터 전래된 이성과 그에 의해 강조된 신성과 보편성,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인한 자연적 본성에 대한 자각, 주체에 대한 철학적 믿음 등이 총체적 앙상블을 형성하며 만들어낸 정신적 구성물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존의 이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의 변화가 진행된데 있습니다.

진화생물학, 뇌신경과학, 유전학(genetics)의 발전과 도전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인간 유전자를 해독하고 그 과정에 개입하여 새로운 종의 탄생을 꿈꾸고 있는 현대과학은 기존의 인격에 근거를 둔 법적 굴레를 진화의 훼방꾼 정도로 여기기 일쑤입니다. 인권의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정당화를 즐겨 하였던 근대정신이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기술적 개조열풍과 함께 불어 닥친 변화된 현실을 전부 담아내기는 몹시도 버거워 보입니다. 여기에는 인격체에 대한 근대적 이해에 묻어 있는 고집스러움과 고지식함도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은 열린 마음으로 변화된 현실과 소통하려 한다면, 사태는 훨씬 나아질 텐데 말입니다.

일정한 사회적 조건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존재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추구하였던 근대정신은 분명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현대적 이해의 폭을 최대치로 확장시켰습니다. 모든 인간은 인격적으로 평등함을 지니고 있기에, 그가 처한 사회적 조건에 상관없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보편적 권리가 이론의 영역을 넘어서 실천적 영역으로 적용될 때 발생합니다. 보편적 사회복지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나의 존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지켜져야만 하는 일정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는 쉽게 지켜질 수 없는 결론으로 우리는 안내합니다. 이른바 나의 존재가 사회적 상황에 상관없이 일정한 인간적 삶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그것입니다. 그에 따른 사회적 책임의 영역은 당연히 무한대로 확장되겠지요.

변화된 현대사회는 개인의 행복을 위한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이 무한대로 늘어날 때는 상황이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무슨 근거로 사회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인간적 삶에 무한한책임을 지는 것일까요? 사회적 책임의 근거를 되물으려는 의도는 당연히 그 책임을 한계와 경계를 명확히 하려는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회적 재화는 제한되어 있으며, 분배도 수학적 평등을 바탕으로 진행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논의가 출발하기 가장 용이한 지점은 아마도 인간의 생물학적 경계를 확실하게 해두는데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접근방식을 살펴봅시다.

합리적 사고로 무장한 자연과학의 발달은 인격적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종()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인격적 존재라는 지위를 이제 막 수정된 배아에서부터 적용할지, 아니면 자궁 밖으로 나온 태아의 특권으로 해석할지를 두고 논쟁이 시작됩니다. 배아부터라면 몇 개월부터 인간의 모습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도 역시 관심이 대상이 됩니다. 배아가 정상인지 아니면 장애를 지니고 있는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장애가 신체적인 영역을 넘어서 정신에게까지 미친다면 이후 태아는 흔히 말하는 인간적 특징을 실현할 가능성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원숭이 보다 못한 지능을 소유한 채 성장한 정신 장애인에게 그가 단지 인간의 얼굴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게만 귀속되는 인격과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급박한 논제는 아니라지만, 복제된 인간의 인격적 지위에 대한 문제도 기술적 발전보다 앞서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시기를 놓친다면 복제와 관련된 수많은 불편한 진실들이 인간의 윤리적 정체성을 심히 훼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퍼트남(Hilary Putnam, 1926~현재)이 제기하였던 통속의 뇌 또한 인격적 존재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역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희미한 과학기술문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뇌에다가 기계의 몸을 입혀서 만든 사이보그를 나의 존재와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대한 논의도 먼 장래의 과제만은 아닙니다. 통속에서 세계를 논하는 의 존재는 공상과학 소설에만 등장하는 실현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의 변화가 여전히 인격을 천부인권으로 정의하고 있는 근대의 정신과 서로 어울릴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보편적 복지가 대세로 굳어지며 우리는 인간의 얼굴에게 인격과 보편적 권리를 부여하는데 대단히 익숙해 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무한대의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된다는 사실이 여전히 우리에겐 불편한 진실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수정 후 배아나 태아가 완전한 개체로 성장할 때, 우리는 인격적 정체성을 부여하며 그 뒷면에 권리를 새겨 넣습니다. 그런데 장애태아라면 어떨까요? 인간적 특징을 실현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정신적 장애를 지닌 태아 말입니다. 그를 위해 무한대의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망설임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사회를 정신적 충격으로 몰아넣은 파렴치한 범죄자의 목숨은 근대의 정신에서 파생된 보편적 권리가 없었다면 아마 이미 오래전에 종지부를 찍었을 것입니다. 복제된 뇌에게 기계의 몸을 입힌 사이보그의 노후를 위해 우리사회는 과연 사회적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돼 있을까요?

물론 이러한 다양한 질문들을 야기한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상상력은 아직 인권이라는 보편적 권리를 부정할 정도로 파격적이지도, 과격하지도 않습니다. 천부인권에 대한 부정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적 저항에 직면해야 하며, 또한 자신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철저한 이론적 토대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벌기 위한 차선책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이른바 인격의 범위를 정하려는 시도가 일차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입니다. 인격체에게 조건 없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면, 우선 누가 인격체인지를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개인에게 허용되었던 보편적 인격과 권리는 이제 청문회를 거쳐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얼굴만으로 인격체로 인정받던 시대는 거의 저물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격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이 왜 갑자기 학자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는지 그 현실적 맥락을 짚어 보았습니다. 인격적 존재를 결정하는 객관적 기준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오늘날 철학적으로 가장 진지하고 흥미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격을 둘러싼 광범위한 이론적 논쟁을 촉발시킨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그 외연이 무한히 확대되고 있습니다. 인격체로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 동물과는 다른 존재론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만약 그러하다면, 그 본질적 특징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본질을 추구했던 전통철학이 바야흐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형국입니다.

 

인격적 정체성과 이성

 

인격적 정체성을 둘러싼 논의는 현대적 사유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철학적 상상력과 그의 역사는 이미 인간과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를 본질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양 철학사를 주옥처럼 수놓았던 많은 정신의 왕자들은 인격의 본질을 정의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지적 정열과 시간을 투자하였습니다. 이성과 자유, 의지와 실존 등은 그들의 노력이 세상에 불러온 대표적인 결실들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세를 떨친 인간적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성적 능력일 것입니다. 이성이란 무엇일까요? 일상어로 굳어져 굳이 장황한 설명을 필요치 않을 듯 보이지만, 이성을 정의하기 위한 철학사의 노력은 가히 눈물겹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성은 세계를 구성하는 보편적 원리와 그것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간주되곤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인식론적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론적 능력이 이성의 전부는 아닙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이해하였다면, 그에 입각하여 행동할 수 있는 실천적 능력 또한 이성의 몫입니다. 이성은 이론적임과 동시에 실천적입니다. 이론과 실천이라는 이중적 영역에 걸쳐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이성적 통찰을 종종 진리와 동일시하도록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역사적 과정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실현돼야만 한다는 가정 하에서 말입니다.

전통적으로 이성의 힘은 진리의 산파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성은 인간 존엄성의 척도로서 간주됩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성적 능력을 인간됨의 기준으로 삼기 시작한 것일까요? 이성에 대한 최초의 광범위한 체계는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플라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플라톤의 철학을 고정된 사유체계로 묶어 정리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사고 또한 일정한 시간적, 공간적 전제하에 펼쳐진 시대의 산물임을 전제할 수 있다면, 그의 철학을 일정한 체계를 통해 파악하려는 시도 역시 마냥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플라톤의 철학적 상상력이 펼쳐진 사회적 맥락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플라톤을 가장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와 대립하며 대화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어느 누구의 철학도 단순한 독백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이 사유하던 시기는 그의 모국인 그리스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유럽문명의 정점을 찍고 있던 때입니다. 당시 대중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피스트입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립니다. 물론 플라톤의 입장에서 소피스트들의 지혜는 단순한 처세술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소피스트들은 세계에 대한 자연적 입장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의식이 만나는 교집합을 대중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의 언어로 바꾸어 보면, 그들은 전형적인 지식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이라는 명함을 지니고 행세를 하려면 자연적 표상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산은 단순히 산이 아니라, 우리에게 비춰지는 산임을 묘사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강을 단순히 강이 아니라, 인간적 삶으로 들어오는 의미로서 규정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연적 표상을 넘어서는 언어로 자신을 무장할 수 있을 때, 지식인은 비로소 무언가 남다름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소피스트들은 자연적 표상을 반성적 언어로 재단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성적 능력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 짓는 대단히 중요한 기준입니다. 구별의 의미는 단순한 우월성이 아닙니다. 사자는 사자로 태어납니다. 원숭이는 원숭이로, 코끼리는 코끼리로 태어나 주어진 몫만큼 살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해석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전형적인 ’()의 존재이자 사이 존재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소피스트들이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사이를 다양한 지적 능력으로 해석하였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특히 소피스트들의 대중적 영향력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설득력에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귀족정치에서 민주적 절차를 중요시하는 문화로의 이행을 경험합니다. 이때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언어적 설득력이 교육의 중요한 목표로 대두됩니다. 소피스트들의 언어적, 인식론적 능력은 정치인들의 교사가 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들은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들의 능력을 사려는 사람들에게 설득의 미학을 가르치게 됩니다.

소피스트들은 종종 그들의 사고가 개인적이고 상대적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독특한 사유방식을 그들이 처했던 사회적 맥락과 분리하여 고찰해서는 안 됩니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은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시대적 과제였으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은 사고를 다양한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실용적 사고방식은 보편성에서 벗어나 판단의 기준을 지극히 상대적으로 설정하게 됩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homo mensura)”

 

소피스트적 정신을 대표하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BC 414?)의 이 경구는 아마도 아테네 교육의 현실적 요구를 가장 잘 반영한 것인 듯합니다. 플라톤은 기질적으로 소피스트들과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 대화편인프로타고라스 Protagoras고르기아스 Gorgias에서 이미 그의 사상적 전투가 시작되니 말입니다. 소피스트들은 주요 논점이 담긴 책을 저술하기보다 주로 현전의 기술, 즉 얼굴을 맞대고 자신을 변론하거나 누군가를 공격하는 수사력의 향상에 자신들의 능력을 집중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들의 사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대부분 플라톤의 묘사에 의해서입니다. 이러한 맥락은 소피스트들에 대한 우리들의 객관적 평가를 다소 방해할 수 있습니다. 소피스트들의 지혜를 언어적 궤변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바로 그것입니다.

궤변론자라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오늘날의 평가는 플라톤의 일방적인 비난에 편승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다소 불공정한 게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철학의 역사 또한 승자의 논리에 의해 평가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나름 공정한 측면이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아테네 시민들은 플라톤과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영원불변의 진리에 오늘날처럼 열광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소피스트들이 그들에게 제공해 주었던 현실적인 삶의 지혜들에 더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비난(?)을 상쇄할 수 있을 만큼 소피스트들은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였던 것입니다. 법적 공방에서도 그들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소피스트들은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을 위해 사태를 때로는 이롭게 때로는 불리하게도 조절해 갈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일종의 변호사의 역할도 수행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대중의 우매함을 향해 직격탄을 날리기를 즐겼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비한다면, 소피스트들은 대체로 민주주의의 대변자들이었습니다. 대중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대중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교정해야만 한다고 소피스트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소피스트들에 대한 플라톤의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는 그들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기인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단순한 세계관의 차이가 사상가들을 적대관계로 만들어 놓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으로 살아가는 지식공장의 시정잡배들과 플라톤을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심층에 놓여 있는 복잡한 심사를 추측해 보는 것이 유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에게 보였던 억한 감정의 시발은 다른 맥락과 맞물려 있었던 듯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소피스트들의 대중적 인기는 대단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플라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소피스트들은 경제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명도가 있었던 소피스트들은 자신의 지식을 팔아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었으며, 저명인사의 반열에 올랐던 고르기아스는 심지어 황금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동상을 세울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여세가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비한다면, 플라톤과 자신의 스승에게 보였던 대중들의 차가운 무관심은 마치 비수처럼 그들의 가슴에 꽂혔을 것입니다.

소피스트들을 궤변론자로 비난할 때 플라톤이 제시하는 근거를 보면, 실제로 그의 논변 속에는 내면화된 원한(ressentiment)도 엿보입니다. 소피스트들이 옳고 그름을 따져 진리의 수호자가 되려고 노력하기보다, 하찮은 지식을 팔아 치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장사꾼에 불과하였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팔아먹고 살아가는 지식상점의 주인들이라는 플라톤의 논평은 단순한 비판 이상입니다.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 중 가장 나쁜 자란 행복이라는 미끼로 마치 그것이 어떤 굉장한 가치라도 있는 듯이 대중들을 속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Gorgias, 464d 1-3, 502e 5-8)라는 플라톤의 비아냥거림은 비판의 수준을 넘어 거의 분노에 가깝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플라톤의 이러한 비판은 단순히 비난 이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피스트들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경제활동은 지식을 파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곳간에 쌀이 떨어져도 꿋꿋하게 글을 읽을 수 있는 선비정신만을 철학자의 진정한 모습으로 인정한다면, 오늘날 과연 몇 명이나 철학자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맞는 일을 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의 모형이라면, 철학자도 철학을 팔아서 먹고사는 것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현실적 조건으로 인정해야 되는 것이지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말입니다. 어쨌든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을 지식상인들로 비난하기 이전에 그들의 사유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는 일에 집중했어야 했습니다. 어떠한 사유도 마냥 무가치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어떠한 사유도 보편타당성을 견지할 수는 없습니다. 플라톤이 좀 더 냉정하게 소피스트들을 바라봤다면, 그들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상당히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플라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철학적 상상력이란 종교적 신념과도 같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철학자란 진리의 파수꾼입니다. 그에게는 진리를 먼저 본 사람으로서 여전히 어둠에 갇혀 있는 다수를 위해 살아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종교적 진리를 설파하며 그 대가로 치부하는 자들을 비난합니다. 플라톤에게도 동일한 맥락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는 철학가를 사칭하며 부를 누리는 자들을 일종의 지적 사기꾼으로 몰아 버린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철학가를 진리의 수호자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르겠지요.

플라톤을 천박한 호기심에 흔들리지 않는 대쪽 같은 선비로 그린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플라톤의 사상에서 우리가 반드시 눈여겨봐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이데아(Idea)에 대한 논의가 그것입니다. 원래 이데아라는 개념은 보다혹은 알다라는 의미의 ‘idein’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보이는 것, 모양, 혹은 물건의 형식이나 종류를 의미해야 합니다. 플라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그는 이데아를 육안(肉眼)이 아니라 이성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존재의 형상이나 보편성 등으로 사용합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것이 덧붙여집니다. 존재자를 다른 것과 구별하여 오직 자신으로 있게끔 하는 진정한 정체성이 그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잡다한 감각세계의 사물과 구별되는 영원불변하고 단일한 실체란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지각된다는 것입니다 (Politeia, 517a517c). 플라톤은 그의 주저국가론 Politeia에서 태양의 비, 선의 비유,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가 어떻게 경험의 세계를 넘어서서 불변의 세계로 나아가는지를 설명합니다(Politeia, 태양의 비유 : 507a7509c11, 선의 비유 : 509d1511e5, 동굴의 비유 : 514a1518b5).

감각의 세계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정박된 개별적 실체의 정체성을 정당화 하려는 플라톤의 철학적 상상력은 어떠한 현실적 함의를 지니고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그의 주저국가론이 전개되는 정치이론과 그 중심부분에서 정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 혹은 정의(正義)에 대한 생각이 그것입니다. 플라톤은 선과 정의를 훌륭한 국가의 구조나 그것의 발생을 규정하는 기능적인 차원을 넘어서 규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정의를 단순히 수단이 아니라, 내적 가치를 지닌 자기목적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특히 인간적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한 사회 내에서 정의가 차지하는 비중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사유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정의란 행복이자 곧 자기실현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상가들에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유의 목적지가 달라지기 일쑤인데, 정의에 대한 플라톤의 신념은 시종일관 동일한 논조를 유지합니다. 당연히 독자들의 궁금증은 한 곳으로 모이게 됩니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정의란 대체 무엇일까요?

불과 얼마 전까지 정의에 대한 담론이 이상하리만큼 우리 사회를 강타한 적이 있습니다. 샌델(Michael Sandel, 1953현재)의 저서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 What's the Right Thing to Do?가 강한 족적을 남기는 동안 정의에 대한 정의(正意)가 한때 관련분야 종사자들의 입을 넘어서 대중들의 지적 소일거리가 된 것입니다. 정의란 대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을 하려다 보니 샌델은 자신의 유명세만큼이나 비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정의를 말하려고 했는데 정작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정의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한 일이라곤 고작 공리주의와 의무주의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배회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는 공동선 혹은 중용의 삶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해 준 것입니다. 하지만 정의를 듣고자 원하는 독자들에게 그의 답변은 과연 충분한 것일까요?

물론 그의 결론이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거쳐야 되는 정거장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정거장들이 무엇인지를 일일이 확인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플라톤의 논의는 정의에 이르는 하나의 이정표를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정의란 무엇일까요? 그의 말을 잠시 들어 봅시다.

 

그렇다면 내가 일리 있는 말을 하고 있는지 들어 보게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리가 이 나라를 수립하기 시작할 당초부터 언제나 준수해야만 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게, 또는 그것의 일종이 정의일세. 자네도 기억하겠네만, 분명히 우리가 주장했고 또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했던 것은, 각자는 자기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에서 자기의 성향이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에 종사해야 된다는 것이었네. [] 또한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일을 하고 참견하지 않는 것이 올바름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이 많이들 하는 걸 듣기도 했고, 우리 자신도 몇 번이나 말하기도 했네.”(Politeia, 433a)

 

정의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주는 대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정의로운 사회는 어떠한 사회여야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논점은 개인의 기질과 성향입니다.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누구나가 자신의 타고난 기질과 성향에 맞는 삶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분처럼 보이지만, 기질과 성향에 맞는 삶의 자리가 무엇인지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언뜻 스치는 단어는 사회적 지위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이 점하고 있는 삶의 자리란 그의 직업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예를 통해 이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언변에 능하며 깊은 통찰력을 지닌 사람은 정치인이 되는 것이 좋습니다. 군인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타고난 용기를 증명해야만 합니다. 자상함을 타고난 사람에겐 교사가 어울리며, 자연적 탐욕을 절제할 수 있는 덕이 있는 사람이 장사를 해야만 합니다. 거론된 예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플라톤의 설명은 경험상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그의 설명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변화를 절실히 원하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입니다. 조금만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플라톤의 정의이론에 따르면, 자아실현이란 자연적인 본성과 그와 연결된 직업적 삶이 실현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분명 한 사회의 부당한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고착화시킬 수 있는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더 나아가 확대된 해석도 가능합니다. 예컨대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정해진 직업이 있으며, 그 이상을 넘보는 것은 그가 속한 사회적 정의를 파괴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육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반동적 생각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정해진 직업이란 대체로 그가 어디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입니다.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연스럽게 농사를 배우게 됩니다. 당연히 흙과 더불어 사는 것이 자신의 타고난 성향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장사꾼의 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일찍부터 셈법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의사나 법조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 의료행위나 법적인 대화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법조계의 테두리일 테니까요. 결국 자신의 기질과 성향에 맞는 직업의 선택이란 어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떻게 자라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부모의 직업을 대물려 받는 것이 일반적 경향으로 자리 잡는 것이지요.

플라톤의 정의이론이 이처럼 해석되어진다면, 아무도 그에게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플라톤이 비난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자유주의자이자 비판적 합리론자로 명성을 날렸던 영국의 철학자 포퍼(Karl Popper, 1902~1994)는 플라톤의 정의이론을 두고 고착화된 계급사회처럼 닫힌 사회를 지향하는 전체주의적 관념이라고 매도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플라톤의 정의이론이 단순한 이론적 작업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주의자라는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현실을 살았던 플라톤의 현장감각을 포퍼는 너무나 이론적인 안경으로 굴절시켜 버린 것입니다. 인류의 경험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플라톤식의 정의이론이 서구의 정치와 경제를 이해하는데 상당부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플라톤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서구사회는 그의 의도대로 변해 왔던 것입니다. 플라톤을 비판했던 포퍼조차도 그의 가정적 배경이 인문학자로서의 그의 삶을 결정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눈을 통해 어쩌면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단면을 읽어낸 것은 아닐까요?

한편 플라톤의 정의이론을 정확히 재현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이 몸담고 있는 신화적 구조를 밝히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신화적 상상력이 플라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올림포스의 신들을 떠올려 봅시다. 그들에게는 각각 자신들의 힘이 미치는 통치 영역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질서가 어디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화입니다. 제우스에게는 하늘이 주어졌으며, 바다에서는 포세이돈의 힘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의 노여움을 사면 어느 누구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지요.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아테나의 미소를 훔쳐야 했으며, 누군가의 사랑을 얻으려면 아프로디테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신들에게 각각 고유한 통치영역을 설정하는 신화는 단순한 문학적 흥미를 넘어서 중요한 인간적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신들의 이름에 새겨진 상징을 통해 세상의 조화를 보는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기하학적인 조화입니다. 모든 영역은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지니고 있으며 신들이 다른 신들의 영역을 인정하고 침범하지 않음으로써, 일정한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이지요. 이 질서가 파괴될 때 신들의 전쟁이 발생하고 그 결과는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참을 수 없는 참담함을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질서를 표상하는 정의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각자에게 자신의 본성에 맞는 삶의 자리를 허용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정의이론은 인간의 존엄함을 규정하려는 신플라톤학파의 중심부에서 화려하게 비상하기도 합니다. 개별적 존재자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신플라톤학파는 이것을 존재자가 표현하는 내적인 장엄함에서 찾습니다. 존엄성이란 존재의 서술어라는 것입니다. 광활한 지역에서 서식하며 포효하는 사자에게서 우리는 동물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봅니다.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한 사막을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의 인내는 우리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 속에도 인간만의 서술어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적 능력입니다.

인간에게는 이성적 삶이 그의 존엄성이 될 것입니다. 이성적 능력은 생물학적 생존을 위해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지적 능력과는 다소 다릅니다. 그것은 도구적 이성이지요. 이성의 도구성은 인간의 근본적 특징 중에 하나임에는 분명하지만, 존엄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존재방식과 관련하여 사상적 흐름에 따라 서구 사회에 깊고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갔던 기독교적 전통은 플라톤의 정의이론을 어떻게 응용해야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개인의 고유한 삶과 사회적 직업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통찰이 그것입니다. 사회 구성원들에게서 대부분의 일생을 훔치는 직업이라는 공간은 기독교적 전통에서 본다면 단순한 돈벌이의 공간이 아닙니다. 직업이란 오히려 그리스도의 부름이 답변되고 책임 있는 삶이 실현되는 유일한 공간인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것을 하라!”

 

플라톤의 정의에 대한 상상력은 실은 이론적 통찰을 넘어서 우리들의 일반적인 삶의 경험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행할 때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아실현이란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의 사유 안에 담긴 그만의 전매특허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성에 대한 강조가 그것입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성이란 인간적 사랑의 최고형태입니다. 이성은 비물질적이고 변함없는 영원의 세계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입니다. 이성은 선함을 통찰할 수 있는 인간의 신적 능력으로서 옮음과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간주됩니다.(Politeia, 517b)

우리는 여기서, 비록 플라톤에 의해 직접 주장되지는 않았지만, 인격적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견해 중의 하나와 조우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성적 능력입니다. 특이한 점은 개인의 이성이 공공의 선을 정당화하는데 맞춰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 저서에서 사용되는 이성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를 보입니다. 오늘날 이성은 개별 실존의 전체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로 사용됩니다. 우리는 저서의 말미에서 목적의 세계라는 이름으로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할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성의 능력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 보편적 전체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하게 하라는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과 관련된 그의 모토는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사회의 안녕이 보장될 수 있다는 신념이 반영된 경구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플라톤을 철학사에 등장하는 플라톤으로 만들어주었지만, 반대급부로 플라톤의 최대 약점으로 되돌아옵니다. 아마도 하이데거가 이 약점을 가장 집요하게 파고든 현대의 거장일 것입니다. 우선 플라톤에 계속 머물러 봅시다.

서양 고대철학에서 신적 혹은 인간적 이성을 의미하는 로고스(logos)는 플라톤과 함께 존재자들을 아우르는 공통분모로 간주됩니다. 이성적 존재란 개별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보편자로 나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가 자연적인 자기 보존본능을 뛰어넘어 절대자인 선의 이데아에 참여할 수 있는 내적 힘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성의 힘입니다.

존재 일반을 보편적인 전체로 이해하고 개별적 이성이 그것에 참여할 때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플라톤의 인격에 대한 설명은 그로 하여금 정식으로 철학사에 자신의 명함을 들이밀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강점이란 그의 최대 약점이 되는 것입니다. 존재를 보편성으로 이해했던 플라톤의 통찰이 바로 그의 철학을 무너트릴 수 있는 아킬레스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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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이란 이름의 형이상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플라톤의 철학적 통찰을 활용하기 보다는, 불행히도 그의 의도를 역행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일반적인 보편성을 추구하였던 형이상학이 실은 보편성 자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상세히 돌아갈 것입니다. 먼저 플라톤의 문제점부터 살펴봅시다. 플라톤의 결정적인 허점은 개별자로서 인격체들을 보편자의 경우의 수들로 격하시켜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격체들이자 개별자들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자신 안에 공간을 열고 자신만의 삶의 이야기를 채움으로써 실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실존의 의미는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인격체라는 개별적 존재의 신비는 보편성의 한 부분이 아니라 스스로 보편성 자체가 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개별자들로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의 한 부분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실존은 자신과 관계를 맺는 모든 것들을 부분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전체라는 말입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사유논리입니다. 논의를 진행하며 더 자세히 설명해 갈 것입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만 언급해 보겠습니다.

보편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근거로 개별 이성과 인격체에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개별자의 이성이 유한한 관점을 통해서만 세상을 반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보편적으로 확장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단한 수학적 논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0도에서 180도 사이를 오가며 세상을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정신의 힘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사이입니다. 이성을 보편성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인간의 조건인 사이를 주목하지 못하고 0180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결과는 때로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적지인 삶을 보지 못하고 길 위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타를 상실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개별자로서만 존재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어떤 보편성이나 절대성을 견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그가 지니고 있는 개별성과 분리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하게 하라는 플라톤의 신념은 분명 정의로운 사회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이성이란 개인의 근본적인 분리성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형이상학적 보편성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인격이 얻을 수 있는 소득은 신기루와도 같습니.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사막을 홀로 지나가는 여행자와도 같습니다. 늘 푸른 야자수와 맑고 신선한 오아시스 그리고 상쾌한 바람을 동경합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희망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지만 낙심과 죽음을 부르는 환영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우리가 누군가의 고유한 삶의 이야기를 인정한다는 것은 다툼과 갈등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상호간의 인정을 회피했을 때 갈등과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격체들은 인정이라는 사회적 행위를 통해 서로 정치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성이 지닌 존재론적 특징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전체가 또 다른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전체와 내적으로 맺는 존재론적 관계가 바로 개인들의 상호인정인 것입니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이성을 통해 보편적 문맥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문맥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이성이 실현되는 우연적인 경우의 수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자신을 보편적 문맥으로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 지니고 있는 존재론적 의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저서의 말미에서 더 상세하게 접근해 갈 것입니다.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격체

 

개인이 자신의 이성을 통해 독립적인 문맥, 이른바 스스로 보편성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칸트에 이르러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칸트라는 인물은 서양 철학사에 자신만의 획을 그은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하나입니다. 단순히 특정한 학파를 형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성향의 철학적 입장들까지도 서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칸트로부터 물을 끌어다 댑니다. 그는 이른바 서양철학의 사상적 저수지가 된 것입니다.

칸트에 이르러 개별적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통해 목적 그 자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칸트 이전에 인격적 정체성이 목적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전까지 인간의 인격이 존엄하기 위해서는 항상 신적 기제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전에 인간의 이성과 인격의 존엄함이란 마치 태양에서 빛이 방사(放射)되고 샘에서 물이 흘러넘쳐 지류가 형성되듯 초월적인 절대자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칸트에 이르러 이성은 본격적인 개별성을 획득합니다. 기존의 인격이란 이름의 형이상학이 개인의 자유와 도덕 그리고 이성이 지니고 있는 엄격한 개념으로 대체됩니다. 그로부터 인격이 지닌 목적성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도 인격의 목적성을 항상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칸트의 생각과는 다소 구별됩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에서 등장하는 인격의 목적성은 상위 존재자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추론해 봅시다. 일반적으로 목적은 항상 그 무엇을 위한 목적입니다. 침대는 잠자리를 위해 존재하며, 의자는 누군가에게 앉을 자리를 제공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이 신성한 이유는 초월적 존재로서 신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존재목적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겠지요. 이렇듯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은 다른 존재자의 수단으로 기능하며 자신의 목적성을 띠게 됩니다. 그런데 칸트는 인간의 인격성을 수단이라는 거대한 그물망에서 과감하게 제외시켜 버립니다. 인격은 수단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목적이 동일해지는 실체라는 것입니다. 칸트에 이르러 인격은 목적 자체로서 인정되는 최초의 존재자가 됩니다.

칸트에게 있어서도 이성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존엄하고, 오직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칸트는 역설합니다. 물론 칸트는 플라톤과는 방법론적으로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이성의 역할은 더 이상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초월자의 인식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에 대한 의지가 이성이라는 동전의 뒷면을 장식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현대 실천철학이 장대한 서곡을 울리는 시점입니다. 그것도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자연적인 보존본능에서 벗어나 스스로 세운 도덕법칙에 복종함으로써, 인간은 이제 자유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물론 세상 밖에서조차도 생각해 보는 것이 가능한데, 아무런 조건 없이 선하다고 간주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한 의지밖에는 없다.”(GMS, BA 1)

 

실천철학의 기초가 담긴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의 첫 문장입니다. 칸트 이전의 철학에서 선은 종종 인간적 행복과 동일선상에서 이해되었습니다. 선한 행위가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면 누가 과연 그 길을 걸으려 하겠습니까? 철학자들은 우주의 이치처럼 선한 행위와 행복을 동시에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모든 물질적 유혹으로부터의 초연을 의미하는 스토아의 아파테이아(apatheia)나 본성에 응해서 살아가지만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는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ataraxia)도 실은 행복에 이르는 진정한 길을 모색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칸트는 선과 행복을 과감하게 분리하여 선을 순수한 의미에서의 내적 상태 즉 내적 동기에 두었습니다. 가히 파격적 행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칸트는 그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행복에 관한 그의 견해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갑니다. 타인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는 호의조차도, 그것이 자신에게 정신적 기쁨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행복의 추구를 행위의 일반적 원칙으로 삼는 것은 그리 크게 문제시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복의 추구에서 행위의 보편타당성을 추론하는 데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행복이라는 이름하에 누구나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 할 것인데,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상대적으로 흘러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에도 보이는 이러한 치명적 결함이 칸트처럼 사고와 추론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시키고 있는 철학자들에게 간과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개인적 행복과 윤리적 행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골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행복을 둘러싼 이러한 엄격한 태도는 분명 칸트의 성장 배경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온 가정의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가 그의 정신세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칸트에게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습관은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성장배경과 사회적 맥락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추구를 사실상 외면하게 한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정황이 선배 철학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행복이라는 개념을 칸트로 하여금 보다 엄격하게 규정하도록 만들었던 개인적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학문내적인 분석을 원하는 우리들에게는 조금 다른 각도가 필요합니다. 이성이 지닌 보편타당성에 칸트가 사상적 무게중심을 실었다고 봐야 됩니다. 보편타당한 법칙에 대한 집착은 17세기 과학혁명의 상징적인 인물 뉴턴(lsaac Newton, 1642~1727) 이론의 유효성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뉴턴에 매료되었던 칸트는 자연과 우주를 지배하는 질서와 법칙이 인식의 범위를 넘어 인간 행위의 내부까지 관철 돼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기란 매우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합니다.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의 모든 인식은 인과법칙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원인과 결과라는 틀에서 파악할 수 있을 때입니다. 암이 발생할 때는 그럴만한 자연적 원인이 있으며,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임상실험을 거쳐야 합니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때, 비로소 새로운 약이 개발되겠지요. 우리의 학문적 인식이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탄생합니다. 물론 우리의 관심영역에는 인과의 법칙이 통과할 수 없는 대상들도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아마도 대표적인 경우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는 철학의 엄밀한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종종 예술과 종교의 언어로 포장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칸트의 주저순수 이성 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간략한 내용입니다.

그럼 행복은 어떨까요? 칸트가 행복을 보편성과 타당성의 세계에서 몰아낸 이유는 그것이 명백한 원인을 통해 추구되기 때문입니다. 늘 제한적으로만 파악된다는 말입니다. 제한적인 것은 보편성이 될 수 없지요. 우리에게는 뭔가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과연 원인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내용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다소 어려운 논리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닙니다. 우리의 학창시절로 돌아가 봅시다. 학기말이 지나고 곧 방학입니다. 지난 학기의 방만한 생활을 반성하며 나는 방학 동안을 보람 있게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아주 짜임새 있는 생활계획서를 세웁니다. 이제 나머지는 그 계획에 따라 사느냐 못사느냐에 달려있을 겁니다. 행여 내가 의지를 발휘하여 세워놓은 생활의 질서를 완벽하게 재현한다면 어떨까요? 최소한 그것은 자기실현이라는 만족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칸트는 이러한 자기 완결적 구조에 주목합니다. 내가 무엇을 구현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의 삶에서 실현한 것은 내가 세운 규칙에 내가 스스로 완벽하게 동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의지가 원인이 되었고 그 의지의 실현이 결과가 된 것입니다. 칸트는 이러한 행위를 자유 혹은 자율(Autonomi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 냅니다. 보편타당한 도덕 법칙이란 개인이 자신의 법칙을 스스로에게 의무지울 때 비로소 성립한다는 설명은 논리적 귀결이 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칸트철학의 대명사로 굳어진 선험철학이 보여주는 본질적인 인격이해에 진입해 들어갑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적 존재란 도덕적 자기규정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정한 법칙에 스스로 복종하는 자율적 인간만이 인간 본연의 정신적 능력을 보편성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목적 자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맥락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를 통해 자신이 원인이 되고 결과도 되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자신의 생물학적 유한성을 넘어서 도덕적 이상을 추구하는 인격체로서 인간의 자기 정체성이란 모든 상품가치를 뛰어넘는 것입니다.(GMS A 94)

칸트는 자율을 선에 이르는 자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자유로운 의지와 도덕적 법칙 하에 있는 의지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GMS, BA 99) 우리는 여기서 인간 존엄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칸트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는 인격체로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도덕적인 주체로부터 온다고 답변합니다. 우리가 모든 인격체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 자체로서 대우해야 되는 근본적인 이유란 그들이 외적 충동으로부터 벗어나 도덕적 주체로서 거듭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음은 그의 대표적인 정언명령입니다.

 

인격이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그것을 단지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하도록 그렇게 행동하라.” (GMS, BA 67)

 

칸트의 인격이론의 핵심부에는 도덕적으로 행위를 할 수 있는 주체라는 개념이 놓여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이 고차적인 이성적 활동, 도덕적 자아에서 찾아질 수 있다면, 그의 존엄성이란 이러한 고차적인 자아의 가능성과 실현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분명 이러한 생각은 칸트의 실천철학이 지니는 강점입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푸는 행위는 오직 자연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그러한 자연의 보편적 힘을 내부에서 실현해 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에 걸맞은 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관계를 따져 실속만을 챙기는 사람에 비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을 우리는 넉넉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부릅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타인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인격을 소유한 사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연적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친구를 위해 내어주는 사람을 보며 우리는 인간 존엄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랑의 질서(ordo amoris)라는 생물학적 한계가 끊임없이 넓어 질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개별적인 사랑의 질서가 자기 자신과 가족, 친지, 친구, 혈연관계를 넘어 보편적 의지와 만나는 지점에서 인간 존엄함의 최고점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강점이 바로 최대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격언 앞에서 칸트도 비켜갈 수는 없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인간 존엄성의 근거는 칸트에게 있어서 보편적 윤리를 추구하는 이성적 능력입니다. 문제는 이성적 능력을 아직 혹은 전혀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윤리적 행위능력으로 간주되는 이성이 인간 존엄성의 유일한 조건이 될 경우,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존엄성이 박탈될 수 있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는 인격체로서의 권리도 의문시될 것입니다. 이성적 존재로서 인격체를 둘러싼 현대의 도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태아, 지적장애자, 범죄인 혹은 일정한 시대와 사회가 비이성적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마녀사냥은 중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이성이 인간 존엄성의 필요조건으로 간주되는 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인 것이지요. 히틀러는 이러한 역사의 산 증인입니다. 그의 악명은 유태인 학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독일인 중에서도 장애인이나 정신병자, 노약자 등 사회에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그는 집단적 살인허가를 명령합니다. 비이성적이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인간적 권리를 박탈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결과를 예견했기에 쉘러(Max Scheler, 1874~1928)가 칸트철학 내부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합리적이고 지적인 주체라는 개념을 대단히 회의에 찬 눈초리로 쳐다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에 따르면 칸트의 인격에 대한 통찰은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인간의 인격됨을 스스로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쉘러의 시도도 이성적 존재가 직면한 현대의 심각한 도전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인격체를 둘러싼 현대의 도전은 다음 장의 과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격을 정의하려는 철학적 노력을 고대철학에서는 플라톤을 거쳐, 근대 철학에서는 칸트를 통해 조명해 보았습니다. 시간과 더불어 초월이라는 형이상학적 색채가 빠지고 인간의 자율성이 강조되는 철학적 인간학으로의 전환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격이라는 개념이 자전운동을 할 때 중심이 되는 축이 이성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했을 뿐이지요. 이러한 사태는 인격을 둘러싼 현대의 논의에 긍정적으로 동시에 부정적으로도 작용하게 됩니다. 다음 장은 이 부분을 살펴보고 현대적 의미에서의 인격에 대해 좀 더 접근해 가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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