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9월 19일 알프스 산맥, 해발 3,200m 부근에 있는 외치계곡 만년 빙하지대에서 얼음 위로 상반신이 드러난 미라가 발견됩니다. 우연한 사고로 사망한 조난자이거나 전쟁 중에 실종된 자로 추정되었지만, 정밀조사 결과 놀랍게도 그는 5,300년 전 석기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밝혀집니다. 현대 유럽인의 조상임을 증명하듯, 그는 잘 짜인 옷을 입고 있었고 가죽신에 가죽 모자를 걸친 사냥꾼 혹은 전사로 추측되었습니다. 발견된 지역의 명칭에 따라 외치(Oetzi)라고 이름 붙여진 이 원시인의 발견은 고고학계에 엄청난 흥분과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집트의 미라 투탕카멘(재위 BC 1361~1352)보다도 무려 2,000년이나 앞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미라를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석기시대의 인류가 간직했던 삶의 비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기사와 다큐멘터리들이 만들어졌고 고고학자들뿐만 아니라 생물학자 의과학자들까지 합세하여 수천 년간 잠들었던 한 원시인의 존재를 부활시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발생합니다. 외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과학자들의 주된 연구관심의 영역을 크게 상회하며 진행된 것입니다. 무엇이 일반인들과 그들의 관심을 먹고 살아가는 대중매체의 시선을 그에게 향하도록 만들었을까요? 대중들의 관심은 고고학적 지식을 넘어서며 오히려 존재론적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외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왜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 설원에서 죽음을 맞았던 것일까요? 그의 치아와 뼈의 동위원소를 분석함으로써 그가 사망지역으로부터 대략 60km 떨어진 지역에서 주로 살았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망 원인이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추위나 굶주림 보다는 추격자들에 의해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제기됨으로써 일반인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왜 자신의 가족과 고향을 벗어나 낯설고 추운 이곳에 수천 년 동안을 누워있어야만 했던 것일까요?
때로 대중들의 시선이 학자들의 전문적인 지식보다 더 본질적인 면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외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유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외치를 통해 인류의 기원을 추적하지만, 대중들은 그에게서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외치를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관심은 원시인들의 보편적인 생활양식에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그가 살았을 자신만의 시간과 그의 존재가 정박된 공간의 이야기가 대중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한 원시인이 살았을 삶의 이야기가 뿌리째 뽑혀진 시간과 공간을 접하며, 우리는 5000년을 뛰어넘어 우리의 내부에서 존재의 불안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뿌리째 뽑혀진 것처럼 말입니다.
“존재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이 언표는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자신의 주저『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보여 주었던 철학적 상상력을 떠오르게 합니다. 비록 단일한 주제로 엄밀하게 기술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 표현이 하이데거의 저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는 이것을 부인하지도 또한 부인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인간 실존에 대한 그의 존재론적 분석이 나름 마음에 들기도 하지만, 이 언표를 통해 우리의 주제인 인격적 정체성에 대한 직접적 통찰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전통적으로 보았을 때 철학사는 이 문제를 진리에 대한 앎의 문제로 환원시켰습니다. 인간이 진리를 인식했을 때 비로소 존재와 일치된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지요. 플라톤(Plátōn, 424/423 BC∼348/347 BC)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élēs, BC 384∼BC 322)를 이어 중세의 형이상학,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근세 철학에 이르기까지 이 출발점은 철학적 사유를 좁은 틀 속에 가둬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존재와 진리를 주체가 인식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하는 이원론적 사고에 갇혀버리게 된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 동일자와 타자, 인간과 자연, 나와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문제의식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하이데거는 철학, 혹은 형이상학의 역사가 왜 항상 존재를 존재자로 왜곡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여기서 찾습니다. 나와 세계가 분리되는 이원론적 구조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추상적으로 표상할 뿐입니다. 그 추상은 우리의 생각보다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인류의 지성사에게 드리웁니다. 진리가 이것, 혹은 존재가 저것이라는 자의적 판단은 하나의 주의와 주장이 되어 그와 대립되는 동일한 주의와 주장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역사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구조적 폭력에 의해 소외된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코자 했던 프랑스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철학적 시도는 최소한 시대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등장하였던 모든 인식적 판단들은 항상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권력을 수반하였던 것입니다. 나와 세계가 겹쳐지는 시간과 공간에서 타자를 지각하는 일이란 곧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와 동시에 발생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나와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분리된 곳에서 타자는 결코 지각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철학의 역사가 타자를 구조적으로 억압할 수밖에 없었던 동일자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비판 또한 이 점에서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닌 듯합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상상력은 전통 철학 속에 숨겨진 존재론적 이원론을 공공의 적으로 삼아 상이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현대 철학에 공통된 존재론적 지평을 마련해 줍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상상력과 마주하여 이구동성으로 들리는 비판적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숨결은 변함없는 메아리로 살아 있습니다. 그의 철학이 진가를 발휘하는 대목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존재자로 왜곡되는 현상을 잘못된 존재의 지평에서 찾습니다. 그가 추구하려는 존재의 지평이란 인간존재에게 펼쳐진 ‘있는 그대로의 현실’입니다. 우리에게 펼쳐진 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여기서 하이데거는 전통 철학이 걸었던 길을 역행하며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을 시도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로 여겨졌던 존재의 세계란 인식주관의 능력으로 만들어지는 지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서 그의 철학적 상상력은 출발합니다. 존재가 드러나는 곳에서 주관의 인식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관이 행하는 대상에 대한 모든 인식은 왜곡과 은폐일 수 있습니다. 주관이 은폐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존재의 드러남과 함께 자신을 기술할 때입니다. 존재의 드러남은 전체의 일부로서 당연히 부분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이 주관이 인식할 수 있는 전체성의 전부라는 점에서 하이데거는 진리를 언급할 수 있는 권리를 얻습니다. 진리란 부분이지만, 그 부분이 곧 전체라는 것입니다. 다소 어려운 사유의 논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이해의 폭을 넓혀 갈 수 있습니다. 진리란, 혹은 존재란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드러나는 것일까요?
하이데거는 존재에게 시간의 의미를 되돌려줌으로써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그것도 개인적 삶을 동반하는 대체될 수 없는 그리고 그 한계가 정해져 있는 시간을 통해서 말이지요.『존재와 시간』은 인간 실존의 유한한 삶에서 묻어나는 대체될 수 없는 고유성을 존재가 드러나는 유일한 지평으로 삼습니다.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왔던 영원불변의 세계와 그것을 대표하는 형이상학적 보편성을 나약하고 한계 지워진 인간 실존으로 끌어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전이는 언뜻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변화로 이어지는 철학적 상상력의 중심 이동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상상력은 철학사적 변화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 이상이 바로 유한자인 인간 실존에 담겨진 시간의 의미를 밝힌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은 전통적으로 진리와 존재를 상징하는 초월이라는 개념을 해명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초월은 우리의 경험이나 합리적 인식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 이른바 신(神) 혹은 최고선(善) 등을 지시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이러한 이해가 해석학적으로 순환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월적 존재를 일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주체는 분명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 해석된 초월적 존재가 우리 자신을 규정한다는 점 또한 중요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자기이해는 해석주체와 해석대상이 서로가 꼬리를 물며 상호 전제되고 있다는 느낌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이 만들어내는 자기이해의 방식을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라고 정의합니다.
자신을 살아가는 개별자로서 인간은 생태계 내에서 자신과 관계를 맺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일은 그것이 생물학적인 중심으로부터 벗어남이라는 점에서 초월이 드러나는 유일한 자연조건입니다. 초월의 존재론적인 시작은 자연적 인과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느끼는 차이에 대한 불안입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자기 자신으로만 현존하는 사물이나 생물학적 중심과 일치하는 본능적 삶을 살아가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이라는 개별자는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반성함으로써 존재론적인 차이를 세상 안으로 들여옵니다. 미라를 보며 뿌리째 뽑혀진 한 원시인의 시간을 지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흔들립니다. 있어야 될 장소에서 이탈한 그의 공간은 우리의 존재에 균열을 야기합니다. 존재에 내재하는 이 차이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동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맺는 인간의 자기관계를 하이데거는 사물의 범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실존이라고 부릅니다.『존재와 시간』에 수없이 등장하는 실존이라는 개념은 존재와 진리 그리고 초월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이런 점에서 실존은 대체될 수 없는 ‘나’의 시간을 그 내용은 건드리지 않은 채 이름만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이데거가 존재와 관련하여 조금 소홀히 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시간의 의미만큼이나 공간의 의미를 존재에게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존재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개별 실존이 자신의 유한성을 안고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개별성 혹은 전체성이라는 개념이 머물 수 있는 존재의 유일한 지평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만의 공간이 전제되지 않을 때 사실상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자신과 관계를 맺는 것은 항상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이미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과거를 기억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정한 장소를 지날 때, 우리는 이미 허공으로 흩어져 버린 자신의 시간을 불현듯 뇌리에서 되살려 내곤 합니다. 나의 존재가 잠시 머물렀던 그 장소는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존재의 환희를 안겨주었던 공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곳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의 원천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그 공간이 나의 존재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추억이 서린 장소를 다시 찾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은 존재에 머물고자 하는 내적 욕구입니다. 그 장소에 직접 자리했을 때, 우리는 존재가 나와 함께 있음을 오롯이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어린 시절을 기억시키는 과거의 사진들은 내가 머물렀던 장소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그 흔적을 보며 우리는 과거의 존재를 현재와 미래로 불러옵니다.
원시인 외치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며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도 동일한 이치입니다. 그가 앙상한 미라가 되어 설원에 누워있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에 자그마한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의 존재가 그가 머물러야 될 시간과 공간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불일치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존재의 불일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나의 시간과 공간이 소외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의 동일한 지각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실에 대한 지각임을 추후 반성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인식의 고립된 주체가 대상으로 전락한 타자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겹쳐짐이 이 지각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의 정당한 의미를 존재에게 되돌려주려는 철학적 시도는 한편 인격적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인격적 정체성이란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며 숱한 변화과정을 거치지만 항상 자신으로 남아 자신을 확인하는 존재의 흔적입니다. 이 흔적은 합리적 이성을 통해 우리에게 인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을 존재의 지평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혹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기인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저서는 인격적 정체성에 대한 자기인식을 정당화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할 것입니다. 개인의 실존적 삶이 써 내려가는 이야기란 대체할 수 없음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존재의 흔적입니다. 그 흔적을 지각할 때, 우리는 존재를 지각하는 통로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의 시대는 이러한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을 요구하는 존재의 목소리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울리는 존재의 목소리를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이 외적인 측면, 즉 다양한 사회적 조건으로 환원될 때 존재는 추상화됩니다. 존재를 지각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직접적 지각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세상 안으로 들어옵니다. 존재에 대한 지각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지각이 부재한 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부재를 느낍니다. 정신적 빈곤함이 우리의 존재를 황폐화시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우리 사회가 어느 시대보다 더 절실히 철학적 사색과 정신의 힘을 요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생물학적인 중심 속에 함몰되어 실존할 수 없도록 진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보존본능을 넘어서는 존재의 영역을 이미 자신의 현실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의 흔적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생활세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지성사에서 인권과 존엄성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정당화 과정을 거친 탓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펼쳐진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정당성을 둘러싼 수많은 논란의 여지는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논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자연적인 인간의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시선으로 들어오고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세계에서 모든 것은 시간과 더불어 변화하며, 그와 함께 다른 그 무엇으로 대체돼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현대 공리주의 이론의 대변자이자 동물 해방론자로 알려진 싱어(Peter Singer, 1946∼현재)는 인권과 존엄성에 관한 현대적 사유방식을 종족우월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폄하한 바 있습니다. 숱한 변화과정에서도 자신과 동일하게 남아 있으며,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인정을 요구하는 존재의 흔적이란 정신적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싱어의 논점입니다. 그의 말처럼, 자연적 질서에 역행하면서까지 인간의 얼굴에게만 대체될 수 없는 무소불위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정당화될 수 없는 전근대적 프로젝트인 것처럼 보입니다. 순수하게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싱어의 주장은 반박하기 쉽지 않은 테제입니다.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정당화하는 인식론적 작업이란 실은 형이상학적 토론이 벌이는 전쟁터에 다름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격적 정체성과 존엄성에 대한 인식론적 견해는 하늘에 떠 있는 별만큼이나 다양하고 상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인격적 동일성을 상징하는 대체할 수 없음과 고유성이 결코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저서는 인격적 정체성을 사물과 구별되는 존재의 세계에서 설명하려는 실천적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것을 비판하는 논점과도 논쟁할 것입니다. 인격적 정체성을 정당화 하려는 철학적 노력은 단순히 물리적 세계에 역행하는 무모한 시도가 아닙니다. 인격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개별적 실존이 어떻게 변화무쌍한 삶의 실현과정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함을 유지하며, 또한 동일함에 이를 수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자신으로 있고자 하는, 혹은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인간적 소망과 희망이 타자를 억압하거나 자연의 다른 종을 차별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자기보존과 인간적 이기심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결코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의 편협한 자기이해는 인간실존이 몸담고 있는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마냥 왜곡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태로부터 분리된 뒤에 찾아오는 실존적 불안감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아이의 모습에서,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지만 다시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에서 우리는 인격적 정체성에 도달하려는 인간실존의 의지를 보게 됩니다.
오늘날 각광을 받고 있는 진화생물학과 다윈의 후예들은 대체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가는 인격적 정체성을 인간 정신의 구성물로 간주하곤 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인격적 정체성은 아마도 인간정신의 자연적 진화의 부산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사태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인격적 정체성과 그 뒷면에 새겨진 인간 존엄성이 허구의 세계와 동일시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부산물이 자신 안에서 또 다른 자신을 구성하는 인간의 실존에게만 주어진 존재의 풍요로움이라면 사태는 여전히 우리의 편입니다. 삶은 우리에게 생물학적으로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만들어 가야만 되는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존재는 이것 혹은 저것이라는 대상적 영역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신을 풍요롭게 꾸며갈 수 있는 지평으로 전환됩니다. 바로 인간 실존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의 시도는 종교적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를 준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종교나 과학이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가장 인간적인 영역을 드러내는 곳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인격적 정체성을 둘러싼 철학적 상상력은 이 세상으로 던져진 실존의 조건만을 근거로 삼고 진행됩니다. 그 이전도 그리고 그 이후의 세계도 분명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단 그것은 철학이 아닌 믿음의 세계에서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작업은 믿음의 세계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인식의 세계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여정을 복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칸트가 걸었던 길이 오류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칸트의 길이 여전히 주체와 대상이 분리된 이원론적 인식이론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작업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펼쳐지는 삶의 단면과 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그것을 충실하게 따라가며 우리는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실존이 타자 그리고 세계와 존재론적으로 분리된 삶을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입니다.
이 증명은 분명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과학의 증명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격적 정체성을 둘러싼 철학적 상상력은 과학적 세계관의 저편에서 자신만의 진지를 구축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철학적 상상력도 시간과 진화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화의 의미를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이론과는 겹쳐질 수 없는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진화와 자연선택을 무기삼아 진행되는 진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화란 과연 무엇일까요?
근대와 더불어 출발한 실증주의적 사고가 세계이해의 주된 패러다임으로 등극한 이후, 전통적인 목적론적 인간이해는 증명되지 않은 허구의 세계로 간주되기 시작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내적인 목적이 있다는 전통 철학적 관점은 대단히 형이상학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경험을 통해 검증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세계를 마구잡이로 주장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대단히 허황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적 그 자체로 간주되는 인격적 정체성의 자리를 비워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라는 또 다른 목적을 채워 넣는다면, 그것은 천박한 목적의 전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천박한 목적의 전도가 야기하는 부작용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일차적으로 목적의 전도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부터 우리를 유리(遊離)시킵니다.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증명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실존에 새겨진 인격적 정체성을 목적이라는 의미의 세계에서 몰아낼 때, 인간의 정신은 자연 앞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군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의 전도는 아는 것이 힘인 시대를 창조하며 자연의 최강자로 군림해온 인간이라는 종의 진화이데올로기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현재 인류의 삶이 이러한 노상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연계를 호령하는 폭군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렇게 이해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을 자연의 주인으로 이해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도, 있어야만 되는 현실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종교도 과학도 폭력적 군주로서의 인간의 지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적 상상력은 인간의 실존을 위해 어떤 경우에도 다른 존재자의 발자취를 지우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아닌 다른 생태계의 흔적일지라도, 서로간의 겹쳐짐 속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 의미가 존재로 불려오기 위해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격적 정체성은 오히려 필수 불가결한 전제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무조건성을 발견하고 지각할 수 있는 통로는 우리 자신을 통과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이라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자연법칙과 함께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고 파괴할 수 있는 특권을 자신에게 부여합니다. 더불어 인식의 힘을 통해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무기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의 인간의 지위를 이렇게 이해하는 동안, 우리는 자연계에서 가장 초라한 존재로 전락할 뿐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존재가 지니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왜곡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존재에게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부여하는 것을 주관적 허구로 폄하하고, 눈에 보이는 적자생존의 원리를 객관적 정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인간 정신의 의미를 축소하는 또 다른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인간 정신은 자신의 힘을 통해 자신을 열어갑니다. 그리고 그만큼 존재의 세계도 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객관적 세계, 즉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지니는 인간적 의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이데거를 오해하지 않았다면, 최소한 그는 진리가 그렇게 우리에게 드러난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는 인격적 정체성의 의미를 통해 하이데거가 걸어갔던 길이 우리의 걷고자 하는 길과 결코 다른 길이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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